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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산에서 곰을 만나면
게시물ID : panic_891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2222
추천 : 22
조회수 : 2752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6/07/11 05: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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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철수는 프로젝트 하나를 마감하자 배낭을 챙겨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피곤한 일을 마치고 피곤한만큼 성과가 따를까 곰곰 생각하자니 피곤의 무게만 늘어났다. 울창한 침엽수림 아래에서 며칠 정신없이 걸어보고 싶었다. 

속초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잠이 들었다. 자전거로 가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선잠을 잤다. 사랑하는 사람이 속초에서 반건조 오징어를 가득 사왔던 기억도 났다. 젓갈과 오징어. 그리고 또 뭔가 있었는데 떠올리자니 졸음이 쏟아졌다.

버스에서 내려 건너편 정거장으로 가면 설악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낯선 곳에서 낯선 버스를 기다리면 여행이 시작되는 기분이 들어야 겠지만, 알록달록한 등산 가방을 둘러맨 이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다들 하하호호 즐겁게 이야기 하는 것을 귓가에 흘리며 점점 고도가 높아졌다.

산속을 한참 오르고 있으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기대했던 것만큼의 바람과 햇살이었다. 그리고 주변 등산객들이 사라져 점점 고요가 찾아왔다. 진작 한 번은 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지난 폭우가 등산로에 큰 생채기를 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채 쓸려가 앞을 막고 있었다. 바랜 리본을 따라 조심스레 등산로를 찾고 있을 때였다.

철수는 커다란 개와 마주쳤다. 저 녀석도 길을 잃었나 주인이 얼마나 찾아 헤맬까. 등산가방에서 불려둔 김병장 즉석밥을 꺼내 개에게 주려 다가갔다. 철수는 개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다. 개도 큰발을 옮겨 덥석덥석 다가왔다. 다가오는 품새가 개와 달랐다. 어깨뼈가 슬렁슬렁 교차하며 거만해 보였다. 순간 깨달았다. 곰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곰이다. 동물원에서 많이 봐온 곰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동물원의 곰보다 너댓 배는 커 보였다. 끝말잇기에서 산기슭을 맞다뜨렸을 때 쓸 수 있는 슭곰. 즉 아주 큰 곰이었다.

죽은 척을 하면 안된다고 들었다. 곰이 가볍게 쿡쿡 찔러보겠지만, 서너 조각이 나버린다고 인터넷에서 읽었다. 

뒤돌아 뛰는 것은 당연히 안된다. 곰은 딱 보기에도 철수보다 세 배는 빨라보였다. 등뒤에서의 공포를 감당할 배짱이 없다.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도 안된다고 들었다. 나무에 오르는 것은 곰의 전공영역이다. 누군가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곰이 기어오를 수 없는 가는 가지에 기어오르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곰은 며칠이고 나무 주변에서 기다리며 먹이감이 떨어지길 기다린다는 이야기도 해설자가 덧붙였다. "당연히 곰은 더 배고픈 상태겠지요."

철수는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있지 말라고 누가 그래도 단단하게 붙어 있었을 것이다. 곰이 말했다.

"오늘이 며칠이냐."

"7월 10일입니다." 철수는 잠깐 생각한 뒤 말했다.

"아니 무슨 해냐." 곰이 되물었다. 짜증은 섞이지 않았지만, 철수는 무언가 심오한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벼... 병신년입니다."

"아니. 허 참. 말귀를 못알아먹는구나."

곰이 조금 짜증나 보였다. 인내심이 많다던 설화가 사실이 아니구나 철수는 생각했다.

"단기 4349년입니다." 이렇게 말했다. 단기를 말하는 것이 자연...부자연스러운가. 조금전 잡아먹힐 것을 걱정하던 입장에서는 아주 자연스럽다. 1988년이 4321년이라는 것을 외운 보람을 느꼈다.

곰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오랜 시간이야. 배고프구나. 오랫동안 제대로 먹은게 없었어. 남쪽에서 올라오며 떠도느라 밥같은 밥을 먹은 적이 없었어."

철수는 삶의 마지막이 이런 방식으로 온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배고픈 곰에게 물려간 이들의 증언을 들은 적이 없기에, 마지막 순간 곰과 대화를 한다는 건 몰랐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리산에 갈 걸, 하필이면 단풍도 없는 설악에 와서 이 고생을 하게 된 것을 탄식했다.터미널 여직원이 조금만 더 상냥했으면 속초행 티켓을 물렀으리라.

"쑥이나 마늘을 가진게 있느냐."

곰의 말은 상식적이었다. 당연한 질문에 철수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쑥과 마늘을 드십니까."

"그러게. 결혼할 사람이 누린내에 민감하더구나. 누구나 상대에게서 바라는 것이 한두 가지는 있지 않더냐."

철수는 마음이 아렸다. 환웅의 취향에 맞춰 입에도 안맞을 쑥과 마늘을 4349년 동안 이 곰이 먹고 있는 것이다. 여름 설악에서 등산을 하며 누가 쑥과 마늘을 들고 다니겠는가. 

"제가 터미널 강원도 특산품점에서 명이나물 한통을 샀습니다. 오늘 저녁 산장에서 삼겹살과 같이 먹으려 산 귀한 것입니다."

곰은 잠시 살핀 뒤 말했다.

"쑥도 아니고 마늘도 아니니 않느냐."

"아닙니다. 명이는 산마늘이라 불리는 것으로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귀한 마늘입니다."

철수는 명이나물을 강원도 농가에서 너도 나도 다키워 똥값이 되었단 말은 하지 않을만큼 정신이 또렸해졌다.

"내어 놓아라. 아깝다 생각치말고 자연의 섭리로 받아들이거라. 꺼내는 김에 거기 돼지고기도 내려 놓거라."

철수는 곰과 헤어져 산장으로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이나물에 돼지고기를 게걸스레 먹던 곰을 보니 지난 수천 년간 인간이 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장의 어떤 커플이 깔깔깔깔 웃으며 코펠에 고기를 굽는 걸 보며, 덜 익은 컵라면을 씹으며 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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