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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락, 무꽃
봄날에
녹평 사무실에서 건너다 뵈는
뒷산비알의 노란 무꽃을 보면서
세상일에 너무 쉽게 화낸 자신을 뉘우친다
지켜보는 이 없이도
꽃들은 저리도 타오르는데
채마밭 같은 고향에서 튕겨 나와
도시 외곽을 전전하면서
누군가를 섣불리 사랑하고
또 성급히 아파한 마음의 골짜기엔
산새 소리가 남아 있다
김명자, 찔레꽃
언니야
찔레꽃 피었다
나물 캐던 밭 언덕
첫사랑 꼴머슴과 소원 빌던 당집 앞
눈찌 곱던 그 얼굴 희미해지는데
꽃은 어쩌자고 저리 곱게 피는지
언니야
저 눈물 꽃 피우려고
열일곱 봄밤에 그토록 울었나
차마 깨치지 못해 품고 간 첫사랑도
입고 간 삼베 적삼도
이제는 다 삭아졌겠지
언니야
찔레꽃 피었다
김영미, 비눗방울
나는 지금 막 독립한 바람
나의 방엔 모서리가 없다
투명한 벽지를 따라
바람이 바람을 실어 나르는 바깥의 시간
디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건너
어느 눈동자에서 나는 가장 아프게 터질 것인가
박소란, 다음에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선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나태주, 손님처럼
봄은 서럽지도 않게 왔다가
서럽지도 않게 간다
잔칫집에 왔다가
밥 한 그릇 얻어먹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손님처럼
떠나는 봄
봄을 아는 사람만 서럽게
봄을 맞이하고
또 서럽게 떠나보낸다
너와 나의 사랑도
그렇지 아니하랴
사랑아 너 갈 때 부디
울지 말고 가거라
손님처럼 왔으니 그저
손님처럼 떠나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