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좋은 날
하고 싶은 일을 하니 좋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니
더욱 좋다
한세정, 물고기의 노래
지금 내 몸을 흔드는 것이
네가 지나간 여정이라면
나는 기꺼이 이곳에서 길을 잃을 텐데
눈빛으로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러 줄 텐데
수초처럼 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후렴구처럼 오래오래
네 귀를 쓰다듬어 줄 텐데
물살을 끌어안으며
투명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물고기의 노래를 듣는다
길상호,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선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 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 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나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꿈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장승리, 보름
설익은 감이 옥상 계단 위로 떨어진다
쿵, 쿵쿵 누가 누굴 때리는 소리 같다
자고 있던 강아지들이 벌떡 일어나
동시에 짖어댄다
썩은 과즙이 누렇게 변색된 감 주위를
달무리처럼 에워싸고 있다
어느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일까 저 달은
썩는 순간부터 눈부셔지는 달빛을 뭐라고
부르나요 당신은
자고 있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
컹컹 짖게 만드는
그 옛날 끝없는 계단으로 떨어진
오늘 밤 저 달은
누가 누굴 계속 때리는 소리 같은데
조용숙, 겸상
수원역 24시간 편의점에서
좀 이른 저녁을 먹는다
밥상 위에 차려진 저녁 메뉴는
컵라면 하나
나보다 조금 먼저 젓가락을 든
노숙자 옆에서 컵라면 포장을 뜯는다
단단히 뭉쳐진 면발을 나무젓가락으로
휘휘 저어대는 그를 흘깃흘깃 쳐다보며
내 라면에도 뜨거운 물을 붓는다
뜨거운 물에 바로 풀어지는 면발 앞에서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냉기를
손바닥에 전해지는 컵의 온기로 녹여낸다
세상에 굽실거리기 싫어
거리에서 혼자 밥 먹는 날이 많았을 그와
아무 데나 함부로 고개 숙이기 싫어
세상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내가
먹으면서 서로 정이 든다는 가족처럼
어느새 많이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