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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어린이, 성고문 당하다
2학년 여름이었다. 방학이 막 끝났을 즈음이었지 싶으다. 그날도 학교를 갔다 와서 소를 멕이러 진지 강변으로 건너갔다. 영진이도 있었고, 형아들이 여럿이었다.
나는 공부를 아주 잘했고, 열심히 했다. 꿈속에서도 나는 늘 공부를 하고 있을 정도였다. 불쌍한 우리 아부지는 막내이가 금판사라도 되는 줄 알고 일절 일을 안 시키고, 공부만 하도록 했다. 지금의 내 꼬라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은 즉각 의심을 거두시기 바란다. 내 진짜로 공부 잘했다. 나는 지게를 져 본 적이 없고, 소풀도 재미로 몇 번 해봤다.
그런데 자나깨나 공부만 하던 나도 소 멕이는 일이라면 기를 썼다. 공부가 취미였고, 공부가 재밌었고, 잠시라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머리에 쥐가 나곤 했던 나도 소 멕이러 가면 벌어지는 재밌는 일들의 유혹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소들은 저네들 알아서 풀을 뜯어 먹었고, 우리는 물새알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형아들과 어울려서 재밌는 놀이도 하고, 물에서도 놀았다. 물에서 놀 때 과일은 너무 좋은 물놀이 기구였다. 위쪽으로 멀리 던져놓고 떠내려오는 과일을 개헤엄을 쳐서 잡고 놀았다. 토마토나 참외도 갖고 놀았지만 역시 능금이 최고였다. 한 입씩 베어 먹고도 오래도록 가지고 놀 수가 있었다. 나는 없고, 다른 애가 갖고 놀 때는 그 작은 능금이 말할 수 없이 부러웠다.
진지에는 능금밭이 많았고, 우리는 자주 능금서리를 했다. 어린 우리는 망을 보고 달리기 잘하는 형아들이 들어가서 능금을 따오곤 했다. 아마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분배 받은 능금을 런닝셔츠를 말아 올려 담았고, 한손으론 능금을 먹으면서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일단 강 건너의 모래밭에 능금을 묻어 증거를 없앤 후 다시 소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진지 강변으로 건너가 있다가 해가 빠질 때쯤 소를 몰고 건너오면서 능금을 캐내가는 것이 순서였다. 표시만 해놓고 능금을 놔두고 집으로 가기도 했다. 날이면 날마다 서리를 하는 것이 아니어서 저장해놓을 필요도 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또 오기도 했고. 그러다가 밤에 비가 많이 와서 떠내려 가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먼저 강을 건너간 형아들이 손짓을 하면서 고함을 질러대는데도 우리는 눈치를 못 채고 능금을 먹으면서 천천히 강을 건너고 있었다. 뒤에서 능금밭집 어른이 덮쳤다. 영진이는 토꼈는데 난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능금밭집으로 곧바로 연행된 나는 서리를 했던 횟수를 과장해서 자백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같이 서리를 했던 형아들의 범행(?) 횟수도 턱도 아니게 불려서 나발을 불었다. 어떤 형아는 능금서리를 100번도 더 한 걸로 불었다.
순진무구했던 나는 왠지 그래야만 빨리 풀어줄 것 같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조사를 다 받았는데도 창고에 갇히고 말았다. 불구속기소를 바랐건만 구속이 되고 만 셈이었다. 어두운 창고 속이 무서워 나는 앙앙 울면서 문을 차고 난리를 쳐댔다. 어떤 애가 능금서리를 하다가 주인에게 붙들려서 창고에 갇혔는데 다음날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도 떠돌던 때였다. 그 소문 땜에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어른이 창고에서 나를 꺼내줬다. 그 대신 나를 빨가벗기고 옷을 빼앗았다. 도망을 못 가게 한 것이리라. 그렇게 불쾌했던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어른이 억지로 벗긴 게 아니고 내가 자발적으로 빨가벗은 게 아닌가 싶다. 소싯적에 나는 누드로 있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별로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에 밝히기로 한다.
어쨌거나 피의자를 빨가벗겼으니 그 어른이 나를 성고문한 것은 분명했다. 나는 빨가벗은 채로 그 집 마당을 뱅뱅 돌았다. 부끄러워 도망을 못간 게 절대 아니었다. 그때 소는 내 머릿속엔 이미 없었다. 오직 옷을 찾아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안 그랬다간 엄마에게 크게 혼날 것 같았다. 옷이라야 런닝셔츠와 빤스, 체육복이자 잠옷에 외출복이기까지 한 반바지가 전부였지만, 그 반바지가 있어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아무리 그래도 빤쓰만 입고 학교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반바지라고는 그것밖에 없었거나 아니면 어릴 때부터 패션감각이 남달랐던 나의 마음에 꼭 드는 옷이었던 것 같다. 빨가벗은 채라도 도망가지 않고 있었던 걸 보면. 그러다가 누드차림으로 옆 능금밭집 딸과 몇 번이나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 여자애는 본의든 아니었든 내 누드를 수차례 보고 말았다. 아직도 그 여자애가 내 누드를 기억하고 있다면 좀 쪽 팔린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어쩌랴, 수십년이 지난 일을.
그러고 나서도 나는 거리낌 없이 빨가벗은 채로 내 옷을 되찾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그 어른이 내 옷을 갖고 들어간 방문 앞을 왔다리갔다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 어른은 나를 검거한 데 만족하지 않고 본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소탕작전을 짜고 있었거나, 내가 거짓 자백한 범행횟수로 피해액을 산출하느라 골몰하고 있었지 싶다.
드디어 날은 어두워져 깜깜해지고 말았다. 이윽고 구명대책위원들(엄마, 아부지, 막내누나)이 아부지의 고함소리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고 말았다. 우리 소가 행방이 묘연하단다. 불법적이고 사적인 성고문에 대해서 따졌기 때문인지, 왕년에 싸움 좀 했던ㅡ고함 잘 지르고 우악스러운 울아부지에게 지레 가위 눌려서인지 그 어른은 혼비백산해서 우리 식구들보다 더 열심히, 미친듯이 소를 찾으러 다녔다. 능금 값 물리기는커녕 소 한 마리를 곱다시 물어주게 생겨버린 것이었다. 그 어른으로서는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 어른이 나를 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에 그랬다면 고자질쟁이였던 내가 아부지에게 꼰질렀을 것이고, 그 어른은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오래 헤매고서야 소를 찾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에 대해선 원래 관대한 아부지야 당연히 말이 없었고, 소를 잃는 바람에 혼겁을 했는지 엄마도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어른은 뒤끝이 야무졌던 것 같다. 그날이 공일이었던지 다음날 운동장 조회가 있었고, 형아들 몇 명의 이름이 교장선생님의 입으로 불려졌다. 능금서리를 한 죄로. 근데 웬일인지 내 이름은 빠져있었다. 형아들은 그날 교무실에 불려가서 선생님들께 혼이 났다. 그래도 나는 조직(?)으로부터의 보복은 당하지 않았다. 형아들이 전부 내 일가들이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기억으로는 그 어른과 다시 만난 적이 없다. 원래 그 어른은 진지 원주민이 아니었는데 오래지 않아 이사를 가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당시 환갑이 훨씬 지났을 그 어른을 ‘홍옥’만한 내가 욕보인 건 아닐까 싶어 죄스런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