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의자 위의 흰 눈
간밤에
마당에 내놓은 의자 위에 흰 눈이 소복이 내렸다
가장 멀고 먼 우주에서 내려와 피곤한 눈 같았다
쉬었다 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지친 눈 같았다
창문에 매달려 한나절
성에 지우고 나는 의자 위에 흰 눈이 쉬었다 가는 것 바라보았다
아직도 더 가야 할 곳이 있다고, 아직도 더 가야 한다고
햇살이 퍼지자
멀고 먼 곳에서 온 흰 눈이 의자 위에 잠시 앉았다 쉬어가는 것
붙잡을 수 없었다
박지웅, 습작
오래도록 첫 줄을 쓰지 못했다
첫 줄을 쓰지 못해 날려버린 시들이
말하자면, 사월 철쭉만큼 흔하다
뒷줄을 불러들이지 못한
못난 첫 줄이 숱하다
도무지 속궁합이 맞지 않아
실랑이하다 등 돌린 구절도 허다하다
한 두어 철 기다리고 꿈틀거리다
첫 줄은 십일월에 떠난다
문득 하늘가에 흐르는 낮은 물결
소리, 고개 들면
기러기처럼 날아가는 아득한 첫 줄
잡으려니 구부러지는 첫 줄
읽으려니 속을 비우는 첫 줄
하늘가 통째로 밀고 가는
저 육중한 산 하나
오래도록 그 첫 줄을 잊지 못했다
김완하, 비행기들의 무덤
모하비사막 한가운데
그대는 누워 있구나
구름을 갈던 어깨도 꺽고
하늘의 꿈도 바닥난 채
발목 접힌 시간을
모래 속에 던진 채로
당나귀 풀이 바람에 따라
구르는 곳으로는 어둠이 오니
달 뜬 밤이면
여호수아 나무 두 팔을 드는 곳
꺾인 날개를 보듬어
그대는 더 낮게 엎드려 있구나
모래 속에 움트는 뿌리를
새로이 수습하는
저 절대의 휴식
김시천, 안부
때로는 안부를 묻고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안부를 물어오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그럴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사람 속에 묻혀 살면서
사람이 목마른 이 팍팍한 세상에
누군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럽고 가슴 떨리는 일인지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걸
깨우치며 산다는 건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오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안부를
일일이 묻고 싶다
이승희, 결
오랜 후회 쪽으로
자꾸만 살이 닿을 때
한 집 건너오는 동안 몸이 반쯤 지워진
노래들
따뜻했다
어떤 맹세는
어깨 위 물방울처럼 이해되었고
어떤 말은
끝나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제 그만 손을 놓아도 되는 거리가 있는가
이 모든 결의 안쪽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
오늘은 어제 도망치고 싶었던 내일이
아니었다고
상한 걸음마다 바람 불었다
내가 당신을 견디고
당신이 나를 견디는 동안
우리는 서로를 잊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사랑의 방식으로
우리는 결에 이르기도 한다
익명의 여행자처럼
어긋남의 골목을 지나
지워진 입들이 폭우로 내리는 밤은
어두웠으므로
조금만 덜 어긋났으면
나는 당신의 결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