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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례, 잔
접동길 산 번지에 때죽나무 칵테일바
쏙쏙 입점하였네 느티나무 상호야
느티나무 독서실 느티나무 식당
느티나무 슈퍼, 나무에
잎사귀 달리듯 하지만
바람의 기척에도 철렁
가슴 쓸어내리는 꽃숭어리 잔들이
물구나무서기로 매달린
때죽나무 스탠드바에 앉아
이국 향기 물씬한 칵테일, 치치
바랄라이카, 모스코 뮬을 거푸
마시는 오후
가장 향기로운 한때를 채웠다
비운 잔들의, 하얀 꽃무덤
이기철, 상수리나무
꽃 피우지 않고도 저렇게 즐거운 삶이 있다
돌 지난 상수리나무 잎새가 새끼 노루의 목덜미 같다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고 따뜻하다
햇빛이 오면 금세 즐거워지는 나무들
나무들이 즐거워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바람이 오면 한 군데도 비워둔 데 없이 왁자히
수선 떠는 아이들 같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같다
오전이 펼쳐놓은 출렁거리는 광목 같다
일찍 여름을 길어낸 삶들은 장화처럼 푹푹 깊어져
손대지 않아도 마구 풀물이 들 것 같다
저 아래로 흘러가는 물소리가
맛있는 것 먹고 떠난 동생 같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도 저 혼자 즐거운 삶이
여기 있다
김영승, 바깥
바깥은 너무 추워
뺨을 마른 오징어 찢듯 찢는 것 같고
물오징어 가위로 쭉쭉 썰듯 써는 것 같은데
집에 들어오니 따뜻하다
바깥은 네온사인에
마천루의 불빛에
해파리 같은데
이사라, 빈 틈
그 사람 죽었어
벼락이 가슴을 치는 날이 있다
내가 더 사랑해도 좋았을 그 사람
그 사람 없어도 내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
죽었다
한 사람이 살다가 비 그치듯 사라지면
그 주위에서 한동안 들끓던 시간이 잦아들며
갑자기 고요해진다
지상의 고요는 그렇게 시작되기도 한다
살아남은 사람이
그 고요를
둥글게 둥글게 쓰다듬는다
그와 나 사이
빈 틈이 없어지도록
그러다 봄날이면
영안실의 꽃처럼 뿌리 뽑혔던 그 사람이
말없이 새순 돋듯
빈 틈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오은, 이력서
밥을 먹고 쓰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쓰는 것
한 줄씩 쓸 때마다 한숨 나는 것
나는 잘났고
나는 둥글둥글하고
나는 예의 바르다는 사실을
최대한 은밀하게 말해야 한다
오늘밤에는, 그리고
오늘밤에도
내 자랑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혼자 추는 왈츠처럼, 시끄러운 팬터마임처럼
달콤한 혀로 속삭이듯
포장술을 스스로 익히는 시간
다음 버전이 언제 업데이트 될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 쓰고 나면 어김없이 허기
아무리 먹어도 허깨비처럼 가벼워지는데
몇 줄의 거짓말처럼
내일 아침 문서가 열린다
문서상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