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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아자씨의 새해 다짐
훈련소에서 자대 배치를 받고 이틀인가 사흘인가 됐을 때였다. 우리 부대는 1년여 전에 신설한 부대로 고참들 중에는 영창을 밥 먹듯이 드나들고, 인생 포기한 듯한 꼴통넘들이 수두룩빽빽했다(부대를 만들 때 여러 부대에서 젤로 골치 아픈 넘들만 골라서 전출을 보내고 받은 것이었다). 그 분위기에, 만만찮은 꼴통인 나도 바아짝 쫄아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또 어떤 고참넘이 영창에 갈 만한 사고를 쳐 버린 것이었다. 당연히 전원집합이 있었고, 내무반에서 포대장이 등장하실 때까지 대기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양반다리 부동자세로 눈알도 굴리지 못하고 얼어 있었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안다. 군대는 병력 파악하다 날 샌다. 탈영 등 각종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여기 가서도, 저기 모여서도 머리수를 헤아린다. 나는 그날 18번째에 앉아 있었다. 아, 쉬파!
내가 왜 욕을 하는 것인지 들어보라. 그래서 나는 17번째 고참이 ‘십칠!’ 하면 정확한 템포로, 명확한 발음으로, 박력있게 ‘십팔!’을 외치기 위해서 속으로 끊임없이 ‘십팔!’을 부르고 있었다. 한 만 번은 불렀지 싶다. 내가 여자이름을 그만큼 불렀더라면 아프로디테도 능히 꼬시고 남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어느덧 ‘십팔’이 나의 뇌와 동일체가 됐는데, 포대장이 등장하기 직전에 고참 둘이 중간에 끼어서 앉아 버린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내 뇌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십팔’을 삭제하고, ‘이십’을 입력해야 되는데 에러가 뜨고 만 것이었다.
곧이어 포대장이 등장하시고, 점호가 시작됐다.
포대장에게 경례를 올려붙인 내무반장이 우렁차게 외쳤다.
“번호오!”
이어서 하나, 둘, 삼, 넷, 오, 여섯, 칠, 팔, 아홉......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내 뇌는 아직 20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재부팅 중이었다.
드뎌 옆의 고참이 ‘십구!’를 외쳤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직 내 뇌는 재부팅 중이었던 것이었다. 불과 몇 초 되지 않았을 그 침묵의 시간이 20년은 되는 것 같았다. 눈동자도 굴리지 못하고 얼어 있었으나 내게 쏟아지는 아, 그 따가운 원망의 시선을 나는 고스란히 아니 천배 만배 확장해서 느끼고 있었다. 아, 쉬파!
내 뇌가 겨우 재부팅이 끝나자 나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 이, 이십!”
내가 20에 대해 원한을 품은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고문관에 등극해(ㅎ) 오만 개고생을 하다 무사히 제대를 하게 됐지만 20과의 악연은 계속됐다. 공중전화로 여자를 꼬시다가 20원이 모자라 놓쳐 버린 일부터 ‘20’ 때문에 곤란을 당한 것을 다 풀자면 원 박 투 데이로 썰을 풀어도 모자랄 만큼 천지베까리지만 시간관계로 생략해야겠다.
그 원한 깊은 ‘20’이 또 내게 왔다. 앞으로 1년간 ‘2020’년이 계속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악착같이 싸워 이길 것이다. 먼저 백수졸업, 갱제독립이다.
앞으로는 아무 영양까도 없는 이따위 잡문이 아니라 아지매들의 가심팍에 불을 질러 그 뜨거움에 스스로 옷을 거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큐피드의 화살보다 백배 강력한 문장들을 제작해 껄떡쇠들에게 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친구인 내가 ‘대문호 사칭 4류작가 아류인생’인 것도 모르고, 나를 대문호로 만들고 말겠다는 일념하에 30년을 한결같이 후원하고 있는 무식하고 순진하고 불쌍한 시봉넘들의 등을 치는 일은 그만둬야겠다.
그리고 또 있다. 중원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나와 겨룰만한 개념있고 품격있는 껄떡쇠가 나타나지 않는다. 껄떡쇠들의 페어 플레이는 전설이 되었다. 나는 이제 딱 한 아지매만 제대로 꼬셔서 은퇴할란다.
2020년,
새해 첫아침
그대의 가슴에
내 첫 마음을
새겨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