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태수, 밥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밥
몸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밥
뜨신 밥 앞에서는
흉악한 도적도 몽둥이를 내려놓는다
대처에서 떠돌다 온 아들에게
노모는 밥을 수북이 담아 준다
'밥'이란 말만 들어도
뇌세포는 벌써 들썩거린다
밥을 능가하는 언어는 없다
밥 차려주는 사람만큼
숭고한 성자도 없다
저승길 떠나는 망자 입엔
물 적신 쌀 한 숟가락
그 한 숟가락 다 녹을 때까진
천사도 악마도 범접하지 못한다
이승저승 다 합해도
밥보다 힘 센 것은 없다
문숙, 중년
독수리가 허공에서 잡은 먹이를 땅에 내려와서 먹고 있다
날개 달린 것들도 먹을 때는 바닥에 발을 내려놓아야 한다
날짐승 길짐승 우루루 덤비며 서로 먹겠다고 아우성이다
이게 내셔널지오그래픽이다
날개가 자유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내 시에 새가 희망처럼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독수리가 머리를 처박고 불안한 자세로 되찾은 먹이를 먹고 있다
이제 상징을 고쳐 써야 할 것 같다
날거나 걷거나 높거나 낮거나
살아있는 모든 짐승은 먹이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음흉한 조물주가 한 가지만은 공평하게 만드신 것이다
귀밑머리 희끗희끗해지고서야 알았다
서봉교, 증축 그리고 신축에 관하여
주천 지서 옆 사거리
오래된 전파사 건물을 뜯는데
시장사람들 기억도 함께 헐어내고 뼈대만 남겨뒀다
칼국수를 먹고 오던 직원들이 신기한 듯 물었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다 부수고 새로 지으려면
비용과 세금 행정절차가 쏘가리를 작살로 찌른 후 뺄 때처럼
아주 복잡하고 조심스럽다는 것을
여자도 결혼 전 이눔 저눔 만나보다 식을 올리면 초혼이고
첫날밤도 수 없이 치렀으면서도
정식 결혼 후 치루면 그게 첫날밤이라고
뭔 말도 안 된다는 여직원들 말을 뒤로하고
그 집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지붕이 없이 뻥 뚫린 지붕위에서
날아온 시멘트 가루가
짓궂은 장난 그만하라고 눈 속에 들어가
알 수 없는 묘한 눈물을 밀어냈다
정호승, 혀를 위하여
봄이 와도 내 혀가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산수유 피는 노란 봄날이 와도
더 이상 내 혀에 봄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해마다 내 혀가 자라
꽃이 피고 가지마다 거짓의 푸른 우듬지는 돋아
나는 후회한다
무릎을 꿇고 참회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입춘이 지나면 운주사 석불들이
한 해 동안 자란 혀를 스스로 자르듯
나도 내 혀를 잘라
곰소젓갈 담그듯 천일염에 담그거나
배고픈 개들에게 던져줘야 한다
침묵의 말을 잊은
내 거짓의 검은 혀를 위하여
봄이 와도 내 혀는 산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라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라
나문석, 비틀거림에 대하여
인터넷 시국을 읽다 말고
베란다에 앉아 애꿎은 담배만 죽이고 있는데
졸음에 겨운 골목길을
한 사내
흔들리는 나뭇잎 그림자 모양으로
걸어가고 있다
멀어서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이쪽도 저쪽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애쓰는
저 완곡한 비틀거림
나는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