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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생활에게
일하러 나가면서 절반의 나를 집에 놔두고 간다
집에 있으면 해악이 없으며
민첩하지 않아도 되니
그것은 다행한 일
나는 집에 있으면서 절반의 나를 내보낸다
밭에 내보내기도 하고 비행기를 태우기도 하고
먼 데로 장가를 보내기도 한다
반죽만큼 절반을 뚝 떼어내 살다 보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도 없으며
그리하여 더군다나 아무것도 아니라면 좀 살만하지 않을까
그 중에서도 살아가는 힘을 구하는 것은
당신도 아니고 누구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고 불안도 아닌
그저 애를 쓰는 것뿐이어서
단지 그뿐이어서 무릎 삭는 줄도 모르는 건 아닌가
이러니 정작 내가 사는 일이 쥐나 쫓는 일은 아닌가 한다
절반으로 나눠 살기 어려울 때는
내가 하나가 아니라 차라리 둘이어서
하나를 구석지로 몰고 몰아
잔인하게 붙잡을 수도 있을 터이니
이윤학, 메꽃
비닐하우스
코아합판 문짝 옆댕이
두 겹 비닐에 메꽃들이 붙었다
불룩한 줄기와 이파리를 비집고
창문에 입술들을 밀착시켰다
흙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끼었다
사라졌다 다시 끼기를 반복했다
할아버지와 살던 소녀는
반만 벙어리였다
한쪽 날개를 늘어뜨린 칠면조가
비닐하우스, 졸라맨 갈빗대 속을
느릿느릿 희미하게 거닐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소녀는 창문에 붙어
코로 숨을 쉬고 있었다
이원, 사랑 또는 두 발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벼랑처럼 감추어져 있다
달처럼 감추어져 있다
울음처럼 감추어져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찾아왔다
열매 속에서였다
거울 속에서였다
날개를 말리는 나비 속에서였다
공기의 몸속에서였다
돌멩이 속에서였다
내 발 속에 당신의 두 발이 감추어져 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내 그림자 속에 찍히고 있다
당신의 두발이 걸을 때면
어김없이 내가 반짝인다 출렁거린다
내 온몸이 쓰라리다
김사인,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최정례, 냇물에 철조망
우리 모두는 사랑하는 이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이다
어제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조금 바람이 불었는데
한 가지에 나뭇잎, 잎이
서로 다른 곳을 보며 다른 춤을 추고 있다
저 너머 하늘에
재난 속에서 허덕이다가 조용히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으로
구름도 흘러가고 있다
공중에서 무슨 형이상학적 추수를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