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엽, 숟가락 통사
숟가락을 바라보며 한국 통사를 읽는다
그곳엔 왕후장상의 하얀 쌀밥이 묻어 있는가 하면
등뼈 굽은 돌쇠의 등겻가루도 묻어 있다
사람은 한울 안에 다 사람인데
은수저 딸깍이는 옆에 나무숟갈도 투닥댄다
지나온 시간들이 저 숟갈에 이끼로 낄 때
역사의 행간 사이로 밥알이 자꾸 묻어 나온다
그래 이 밥알
고려 분녀의 눈물인가 조선 얼금이의 한숨인가
뒤돌아보면 우리 역사는
먼지 낀 책이 아니라 숟가락 속에서 흘러왔다
청산리와 다부동
산비탈 흙 속에 숟갈 하나 남기고 간
젊은 넋들의 가쁜 숨도 그것에서 묻어나왔다
저 거울, 오천 년을 비추는 유리창
은빛 그 숟가락을 한동안 바라보며
오늘은 한국 통사를 가슴으로 다 읽었다
박현수, 그저 열심히
가방을 뒤지고
윗주머니에 손을 찔러보고
속주머니를 만져보고
앞뒤 바지 주머니를 두드려보고
수신호하는 야구감독처럼
알기 힘든 행동으로
물결이 다음 물결을 만들 듯
하나의 몸짓이 다음 몸짓을 일으켜
그저 열심히 여기를
만지고 저기를 두드리며
춤을 추듯
아래를 두드리고 위를 만지며
일순, 갈 길을 잃은 생이
박윤배, 발치(拔齒)의 시간
이유 없이 기울어지기야 하겠냐마는
입춘에서 우수의 한 절기를
혀로 지그시 앞니 자빠트리며 보냈다
이쯤에서 진통제 먹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꼿꼿이 서 있느라 가보지 못한 기울기의 각도
꾹 눌러도 보았다가 당겨도 주는 것인데
살아온 날들이 뿌리 끝에서 저릿하다
젖 먹을 때부터 지은 죄들이 다 일그러뜨림에 닿아
핏물 낙조로 헐떡거리는 이 무모한 중생아
있고, 없고의 차이가 궁금해 아
벌린 입안을 손거울로 비춰보는데
난데없이 늙음을 전송해 온 40년 전 첫사랑이
갑자기 밉다, 흔들림 뒤 결국엔 빠질 이빨
잇몸에는 붉고 쭈글한 치통의 기억
설산 크레바스 구멍처럼 남겠지
이유 있는 문을 열려다가 생겨난 통증이여
이제 그만 질긴 들꽃 물어뜯던 기억으로 가라
없는 달의 모서리 자근자근 깨물다가
뻥 뚫린 허욕의 자리가 생각보다 크다
이영광, 시인이여
모든 말을 다 배운 벙어리
혀 잘린 변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시인이여, 젊어서 늙는다
사랑 없는 사랑 앞에 조아리고 앉아
어서 목을 쳐주길 기다리는
사랑처럼
한 말씀만 비는 기도처럼
말 모르는 그것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시인이여
늙어서도 힘내어 젊는다
김광기, 뿌리의 역학
뿌리가 흔들린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세상의 뿌리는 되지 못한다
온 마음을 현실에 심고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두말할 것도 없이
뿌리는 관념이다
그냥 그랬으면 하는 허구일 뿐이다
부표처럼 떠다니는
뿌리의 역학
소실되는 것이지만
어쩌면 이미 무명을 얻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지표에 굳게 박힐 미명이라는 것을 믿으며
멀쩡하게
다시 가지가 되고 잎이 되고 싶은
볼 수도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환상의 리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