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유여무여(有餘無餘)
한동안 어지럽던 꿈 이어지지 않는다
집을 떠나 너무 오래 헤매고 다녔나
했을 땐, 왜 그렇게 꿈속에서도 자주 거처를 옮겼을까
식구들 뿔뿔이 흩어졌고 소식이 없고
북적거리던 활기들도 적막 한속에 숙였으니
다락에 앉아보면 바다로 펼쳤는데
거기 뜬 쪽배 한 척 없다면
어느 겨를에 출입조차 써늘해진 청동 속에 가둬져
당겨진 수평 끝에 매운 혀를 매다는
뭉클한 종소리만으로
나는 수초처럼 마음얼룩들 쓰다듬지 못하겠다
수심에 일렁거리는 건 헐벗은 해조
숨차서 솟구치던 천둥벌거숭이도 어느새
부레를 잃어버려서
잠긴 뒤로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데
그도 구름이 조율하던 바람무늬였을까
아무리 뜯어도 이 탄금 펼쳐지지 않아서
제 곡조 얻지 못하는 현들의 저녁
날개를 옥죄는 검은 혀의 전족처럼
소스라쳐 깨어나는 한때의 메아리처럼
김선호, 그늘의 소유권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늘을 만든다
꽃잎은 열매를 떨군 통증이 만든 얇은 그늘이고
돌은 어둠이 밤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을
조금씩 뭉쳐 만든 그늘이다
그늘이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그늘을 갉아먹는다
손부채로 얼굴에 그늘을 만들고
길을 나서다가 보았다
100년 수령의 느티나무 그늘을
순간 삼키던 허공
바람이 수시로 들어올리던
해수욕장에서 빌린 그늘막처럼
그늘의 경계는 허술했다
내 속에 심어놓은 그늘의 뿌리는
가늘고 얕아서 종일 일렁인다
소유권을 가진 자가
빠른 속도로 거두어들이면
거울에 비친 내 몸처럼
감출 곳이 없다
조행자, 봄산
어둠이 내려
어둠을 찾아 둘레둘레 살폈지만
어디에도 어둠은 없고
봉굴 봉글, 벚꽃나무 꽃 떼
산, 이마가 밝다
산이여
무엇을 굽어보고 계시는가
이태수, 봄날 한때
창가에 앉아 졸음 겨운 눈을 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빠져들어 읽던 책 속의
글자들이 꼬물거리는 벌레들 같다
깜빡 잠든 사이의 짧은 꿈은
오리무중, 까마득하게 물러서 버리고
눈꺼풀이 자꾸만 다시 맞붙는다
꿈은 언제나 부질없게 마련
책 속의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던 길들도
다 흐트러져 버렸다
나사 풀어진 로봇처럼 풀어져서
흐느적거리는 이 이른 봄날 한때
가까스로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본다
새들이 탱글탱글 하늘로 솟구치고
개나리, 목련꽃을 활짝 밀어 낸 나무들은
제 발치에 돋아나는 풀잎들을 내려다본다
몇 번이나 눈 비비고 들여다보니
비로소 책 속의 글자들도 느릿느릿
제자리로 돌아와 서거나 앉는 중이다
이은유, 태양의 애인
평생 애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
숲의 숙명은 태양 아래 그림자로 일평생을 사는 것
숲의 나무들은 조용하다
시큰둥한 구름이 흘러가는 동안 태양이 잠드는 소리 듣는다
바람에 살갗 비벼대는 나뭇잎은 귓속말로 속삭이다가
부스럭부스럭 소란스럽고
저녁나절 밀어를 나누던 새들은 시끄러운 아침을 시작한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농담이 아니다
풀잎에 안간힘을 다해 매달려 있는 이슬방울은 거처가 불안하다
가까워진다는 건, 몸을 바짝 낮추다가
높게 되는 것
온몸 말라가며 피 흘리는 광합성을 원하지 않는다
엎어져 낄낄거리다가 돌아서는 명랑한 울음을 받아줄 뿐
안 보이는 곳으로 달아나지 않는 한 멀어지지 않는 법
이별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태연하게 하늘이 내린 땅의 습기를
더 깊이 호흡하는 것
심장이 쿵쾅거릴 때 심해의 물고기들은 아가미를 닫고
꼬리지느러미 흔든다
수면 위의 난삽한 고요, 이건 시시한 농담이 아니다
질투라는 다른 이름이다
숲은 태양에 집착하지 않는 척 한다
두려움에 맞서 태양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고
나무들은 팔 벌려 고개를 쳐들고 귀를 기울인다
질투로 무성해진 숲은 향기를 내뿜어 그늘 두꺼워지고
너와 나의 관계는 가까워질수록 높아진다
땅 위에 포복하여 납작해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