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kH2a3sT3IS0
천수호, 잎과 잎 사잇길
멀어지고 가까워지는 것이 나무의 뜻이 아니어서
거리는 추상이다
잎과 잎 사이는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추상은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는 울돌목의 파도가 지나가는 해협
새 울음이 추상을 토악질한다
아무리 게워도 죽음은 추상이다
한 사람이 떠난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잎과 잎 사이처럼 갈 수 없는 거리여서
거리는 죽음에 고유하다
잎과 잎 사이
조류가 거세어서 우는 소리로 들린다는 울돌목
그 해협을 가르며 새 한 마리 날아오른다
잎과 잎이 공허한 추상으로 떨어진다
이만섭, 물푸레나무의 미간(眉間)을 읽다
볕 좋은 날, 개울가에서
이마와 이마를 맞대고 반짝이는 물푸레나무
푸른 이파리들을 보면
마음이 저절로 싱그럽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소담하게 피워낸
흰 꽃을 언뜻 보았을 때
그 빛나는 생명의 환희는
한 줌 햇살에도
가슴까지 밝아오는 기쁨이 있는가 하면
빛살이 닿지 못해 개화하지 못한 꽃봉오리
개울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물푸레 물푸레 제 몸 풀어가는
어디에도 슬픔 한 점 없는 평상심이 더 아름답다
기쁨이나 슬픔이 안부를 물어 올 때
공손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얼굴과 얼굴 사이에 핀, 또 다른 꽃으로
기쁨은 떠받히고 슬픔은 흘려보내는
마음의 은신처를 몸 밖에 두었으니
나무는 자화상을 미간에 새기는지도 모른다
허혜정, 시인과
북적이는 연회장에 아픈 얼굴이 있다
방명록을 들치지 않고, 기념사진도 찍지 않는
별달리 알아 보는 이도
그의 외떨어진 걸음을 좇아가는 이도 없는
아무도 무슨 시를 쓰느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그저 수상자를 위해 찾아왔을 하객인 누군가가
특별히 만난 일은 없지만
그대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다
진실로 간직하고 싶었노라 말하고 싶다
무어라 할까, 이상하게 오래 남아 울리던 말들
어둠 속에 바삭이는 비밀의 필사본처럼 적막에 싸인 세계
낡은 목조 책상이 놓인 실험실을 떠올렸다
그대의 책장에서 원소들이 담긴 유리병을 상상했다
마그네슘이 흰, 또는 붉고 푸른 냄새와 맛을 간직한 가루
얇은 백지에 조심스레 쏟아낸 말들의 결혼을
불꽃반응을 관찰하는 아이처럼
신비스런 말들을 천천히 되새기면
알콜 램프에서 팔락이며 피어오르는 휘푸른 불꽃
눈망울을 아리게 하던 불꽃
사각이는 글자를 온기로 물들이며
예민한 불꽃을 피워내는 영혼의 원소들
빛을 향해 끌려가는 침묵과 먼지 냄새 가득한 꿈
그대 언어의 빛은 얼마나 고적하고 슬펐던 것인지
김지원, 그릇
우리 몸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
꾹꾹 물러 담아도
허기를 다 채울 수 없는
무한의 종량제
입을 열 때마다 악취를 풍겨
한번 벌린 입을
다물 수 없는
욕망의 그릇
아, 누구인가
이 오지 그릇에
푸른 하늘을 가득 퍼담아 줄 이는
이태수, 어떤 거처
오래 전 우리 집 마당으로 이사 온
계수나무 두 그루
바라보면 볼수록 침묵의 화신(化身) 같다
겨울이 다가서자 지다 남은 잎사귀들이
햇빛 받으며 유난히 반짝이지만
몸통은 벌써 침묵 깊숙이 붙박여 있다
잎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오르든
바람에 휩쓸리어 다 지고 말든
침묵만 몸통에 은밀하게 오르내리고 있는지
해마다 눈에 띄게 커지는 계수나무 둥치는
제 안에 침묵의 거처를 키우고 넓혀
차곡차곡 쟁이려 하는 것 같다
두 계수나무 사이에 서 있는 산딸나무도
자기에겐 왜 마음을 주지 않느냐는 듯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