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점
남산을 지날 때면 점(占)이 보고 싶어진다
왜 흘린 세월이 한 번뿐이라고 생각했는지 알고 싶어진다
꼬리가 있었는지 뿌리를 가졌는지
남산에서는 내 오래전을 뒤집어쓰고 끊어진 혈을 여미고 싶다
이빨이 몇 개였는지 불에 잘 탔는지
목은 하나였는지 화석은 될 만했는지
그 발치들을 가져다 멋대로 차려 놓고 싶다
간절히 점을 보고 싶다
삭제된 것들의 입장들
우물쭈물하는 물질들
세수 안 한 것들의 안면들
끝이 언제인지 모를 이 예비의 관계들
나에게 잘해주지 못한 안색들
결국은 이것들로 몸 한 칸의 물기를 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풍부한 공기에 대담히 말을 풀어놓고 싶다
가을에 남산을 지날 때면
이 숲 나무에서는 소금 맛이 나는지
그 맛이 사람 맛인지를 알고 싶다
나에게 이토록 박힌 것이
파편인지 비수인지
심장에서 내몬 사람이 하나뿐인지
훗날 다른 생에서도 사람을 갖고 싶은지까지도
나태주, 밥
집에 있을 때 밥을 많이 먹지 않는 사람도
집을 나서기만 하면 밥을 많이 먹는 버릇이 있다
어쩌면 외로움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밥을
많이 먹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
밥은 또 하나의 집이다
이미란, 당신이라는 간이역
나는 추억을 부정하진 않는다
오늘도 인연이라는 완행열차를 타고
당신이라는 간이역을 찾아간다
시간이 지나가는 길목엔
처음 같은 두려운 풍경이 기다린다
어느 날은 대낮의 플랫폼에서
아직은 낯선 당신 얼굴을 떠올리기도 하고
어느 날은 어두운 대합실에서
연착을 알리는 당신의 깃발을 찾기도 한다
당신은 나를 가벼운 눈길로 배웅하라
뜨거운 악수는 생략되어도 좋다
진한 이별의 말은 나누지 않아도 좋다
당신을 만나기 위한 많은 날들과
당신을 만나고 돌아선 많은 날들을
천천히 기억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리니
당신의 이름이 과거로 명명됨을 슬퍼하지 마라
또 다른 간이역을 찾아 떠나는 나는
당신의 눈빛에 이 말 한 마디를 남겨둔다
나는 추억을 부정하지 않는다
추억이 된 당신이 못내 서러울 뿐이다
서상만, 수양버들의 연애법
저런, 저런
휘늘어진 머리, 다 풀어헤치고
바람을 붙잡고 무슨 음계로
저리 물색없이 놀아나는지
커다란 물거울에 제 얼굴 들여다보고
연둣빛 물오른 낭창한 허리를
이리저리 꼬면서
저수지의 고요를 흔들다가
긴 머리로 물의 옆구리 꾹꾹 찔러대네
저편까지 수양버들의 마음은
둥글게 퍼져 가는데
짐짓 모른 채 눈을 감은
저 고요한 저수지
소금쟁이만 마음 한 자락 읽다가 가네
문정희, 통역
깃털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와
어깨를 툭! 건드린다
내 몸에서 감탄이 깨어난다
별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오래된 기억을 건드린다
물살을 슬쩍! 일으킨다
깃털과 별과
나 사이
통역이 필요없다
그 의미를 묻지 않아도
서로 다 알아들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