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다정한 사물들
음악처럼 말을 건네는 밤
별이 내게로 왔다
번개처럼 사랑을 고백한 당신
손등에 키스했지만
밤길을 동행하지는 않았지
이래라 저래라 말하지 마, 지겨워
의자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저 옷들은 내 취향이 아니야
당신은 전혀 속내를 말하지 않았지
옷장에 차곡차곡 저장만 하고
봄이 와도 입지 않았지
바늘구멍을 뚫고 취직한 선배는
빨간 입술로 이상한 충고를 하지
자유로운 물고기로 사는 게 좋아
도다리처럼 눈을 흘기면서도
우아한 미소를 짓는 정원의 꽃들
그림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커다란 나무들, 징그러워
불편한 식물들을 외면하는 밤
달은 더 어두웠고
난 피아노를 연주했다
이영광, 기우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우리가 맨발로 걷던
비자림을 생각하겠어요
제주도 보리밥에 깜짝 놀란
당신이 느닷없이 사색이 되어
수풀 속에 들어가 엉덩이를 내리면
나는 그 길섶 지키고 서서
산지기 같은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을 노려봤지요
비자림이 당신 냄샐 감춰주는 동안
나는 당신이, 마음보다 더 깊은
몸속의 어둠 몸속의 늪 몸속의 내실(內室)에
날 들여 세워두었다 생각했지요
당신 속에는, 맨발로 함께 거닐어도
나 혼자만 들어가본 곳이 있지요
나 혼자선 나올 수 없는 곳이 있지요
먼 훗날 당신이 아파지면
웃다간 눈물 나던 비자림을 찾겠어요
정원숙, 당신의 별사(別辭)
당신은 또 다른 당신에게로 향하고 있다
방을 떠나면서 떠나지 못하는 당신
당신은 또 다른 당신을 잃고
눈물을 글썽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삶이란
끝없는 지평을 달려
한 계절을 앞서는 것임을 깨달을 때
당신의 또 다른 당신은 이미 방을 떠나고 없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업
몇 억 겹의 업이 쌓여야
우리는 죽기 전 한 채의 성을 쌓을 수 있을까
당신의 방은
당신의 얼, 당신의 침묵, 당신의 전 존재
그곳을 벗어나서야 당신의 또 다른 당신은
당신을 겨우 떠올릴 수 있을까
삶은 부재할 때만이 곡진해지는 법
방은 하얀 백지
말들이 뜯는 풀은
그 백지 위를 뛰어다니는 펜
그리고 푸른 말들이 내뿜는
파릇파릇한 콧김은
당신이 또 다른 당신에게 띄우는
별사(別辭)인지 모른다
그 별사를 써나가는 즈음
생은 이미 저물어 밤으로 접어들고
달빛은 방을 기웃거리고
당신의 이마는 달빛에 그을리며
자꾸 늙음 쪽으로 기울고, 지독한 겨울이 와도
칼바람이 방울소리를 끌고 지평을 달려도
닿을 곳이 없는 당신의 말들
그 말들이 지독히 추운 당신의 방을 지금 떠나려 한다
말들을 풀어주면 그곳에 남는 것은
당신과 또 다른 당신이 나누던
부드럽고 달콤했던 청춘의 밀어들뿐
당신의 방은
청춘의 한 지점에서 아직도
환한 등을 밝히고 있을 뿐
삶은 고작
먼지 한 톨로 변한 당신과 내가
먼 우주로 보내는 슬픈 별사일 뿐
한영옥, 때
내 몸 안의 한 섬 쌀 알
죄다 털어내어
밥 짓고 떡 치고
그대 몸 안의 한 말 소금기
죄다 우려내어
배추 절이고 무 절이고
내어놓을 마음 더는 없을 때
따로 먹은 마음 이제 없을 때
한혜영, 말의 재활용
쓰고 남은 말을 쌓아두는 야적장이 있다면
나는 삼백육십오일 창고에 갇힐 거야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송전탑처럼 가시가 돋친
부러진 삽날처럼 뒹구는 쏙쏙
알맹이만 발라먹은 게 껍질 같은
레게머리처럼 가닥가닥 배배 비틀어 꼰
반쯤 타다가 말았거나 지금도 불타는
뇌관 시퍼렇게 터지지 않은
말을 수선하는 일로 식음을 전폐할 거야
날마다 용접봉에 불꽃 튀기며 말을 수선할 거야
알록달록하게 페인트칠도 하고
달랑달랑 예쁜 고리도 매달아준 뒤
이 재활용품 말을
내 나머지 인생 한쪽에 쌓아놓고
인심 좋게 나눠줄 거야
지지든지 볶든지
그대 인생에 약간의 영양가를 끼치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