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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z8xncDaPpaA
최문자, 발의 고향
내가 나라는 때가 있었죠
이렇게 무거운 발도
그때는 맨발이었죠
오그린 발톱이 없었죠
그때는
이파리 다 따 버리고
맨발로 걸었죠
그때는
죽은 돌을 보고 짖어 대는
헐벗은 개 한 마리가 아니었죠
누구 대신 불쑥 죽어 보면서
정말 살아 있었죠
그때는
그때는
세우는 곳에 서지 않고
맨발로
내가 나를 세웠죠
그때는
내 이야기가 자라서
정말 내가 되었죠
불온했던 꽃 한철
그때는
맨발에도 별이 떴죠
그 별을 무쇠처럼 사랑했죠
날이 갈수록
내가 나를 들 수 없는
무거운 발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별똥별이죠
발도 고향에 가고 싶죠
박후기, 냄새 타령
냄새는 왜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가
십년 전 겨울
골목 깊은 곳
냄새나는 반지하방
두 번 다시 청국장 끓이지 마라
소리 지르던 가난한 식탁
반찬 투정 끝에 끌려 나가며
울고불고 문고리에 매달리던
일곱 살 어린 나처럼
옷걸이에 매달리거나
방구석에 몸을 숨긴
냄새는 쉬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출근길 전철 안
가방 속까지 냄새가
따라온 걸 알고
책을 꺼내 읽지 않았다
반지하 구린 냄새를 피해
아파트로 이사 갔다
나는 이제
밖에서 온갖 냄새를
몸에 묻힌 채
집으로 돌아온다
이진엽, 투명한 벽
점심 먹으러 가다가 현관 모서리에서
머리를 수차례 유리창에 부딪치고 있는
비둘기 한 마리를 보았다
먹이를 찾으려 했을까
중앙 출입구 안쪽까지 몰래 들어왔다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탈출하려고 버둥댔다
바로 저기
아늑한 둥지가 느티나무 위에 있지만
빤히 보고서도 그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세계와 나 사이
투명한 벽이 있음을 그는 미처 몰랐으므로
눈부신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무엇을 향해 돌진하며
가슴을 부딪치면서 살아왔던가
사랑과 구원
혹은 별빛이 늘 저쪽에 있었지만
투명하게 눈을 찌르는 이상한 벽을 몰랐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 갈 수 없었다
거대한 유리창
세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담장으로
눈을 멀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우리는 그냥 보인다고만 소리치다가
충돌의 몸짓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오늘, 급식소로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비둘기 한 마리
존재의 집을 찾으려는 그 절박한 날개짓으로
내 어두운 두 눈을 맑게 비벼 주었다
이재무, 갈대들
강변에 줄지어 서 있는 갈대들
불어오는 바람
세차게 몸 흔들어대도 갈 데가 없다
갈대라고 해서 왜 가고 싶은 곳이 없겠는가
깊숙이 내린 뿌리 악착같이 움켜쥔
진흙 터전 차마 떠날 수 없어
흐르는 강물에 제 그림자 드리우고
달빛 사무쳐도 별빛 영롱해도
제 몸 안에 고인 갈빛 울음
밤새 퍼 올려 허공에 뿌리고 있다
이장욱, 얼음처럼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나는 자꾸 물과 멀어졌으며
매우 다른 침묵을 갖게 되었다
나의 내부에서
나의 끝까지를 다 볼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저 너머에서
조금씩 투명해지는 것들을
그것은 꽉 쥔 주먹이라든가
텅 빈 손바닥 같은 것일까
길고 뾰족한 고드름처럼 지상을 겨누거나
폭설처럼 모든 걸 덮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가위 바위 보는 아니다
굳은 표정도 아니다
내부에 뜻밖의 계절을 만드는 나무 같은 것
오늘밤은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하다
는 생각 같은 것
알 수 없이 변하는 물의 표면을 닮은
조금씩 녹아가면서 누군가
아아
겨울이구나
희미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