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출처 : https://youtu.be/2Vlvsl92CjY
손세실리아, 귀머거리 연가
혼수상태가 열흘을 넘어서자
산소 호흡기는 부착보다 제거가 못할 짓이니
애당초 숙고하라는 조언과
죽음이야말로 존중받아 마땅한 권리라는
고견이 조심스럽게 전해졌다
튜브를 통해 유동식을 코에 흘려 넣고
줄줄 세는 대소변을 수발하다가
엎질러진 등잔불에 화상 위중했던
유년으로 회귀한다
목숨 건사하기도 힘드니
그쯤 해두라는 수군거림 아랑곳 않고
귀머거리처럼 표정도 대꾸도 없이
벌겋게 익어 까무러진 여식 들춰 업고
용하다는 의원 쫓아다니며
치성 드리듯 백약 바르고 먹여
사람 꼴로 되살린 엄마
혼자서는 먹지도 뒤척이지도 못하는
전생의 딸을 위해
이제는 내 귀가 절벽강산이 될 차례
김종목, 고요한 낮달
소리도 없이
누가 길을 가나보다
구름이 살그머니 옆으로 비켜서면
하얀 치맛자락 바람에 달리듯
살짝 보이는
고무신 한짝
소리도 없이
누가 길을 가나보다
꿈길을 가나보다
박찬세, 빈 방
어미는 꿈을 꾼다
지붕마루에 까치가 우는
잘못 묵은 지붕은 무엇으로 한을 달래나
빠진 앞니를 구렁이가 물어 가면 아이는 말을 잊는다지
어미는 또 까무룩 구렁이 꿈을 꾼다
아이는 말을 잊고
말을 잊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칠 땐
창문에 입김을 불어 글을 쓴다지
흐려진 풍경이 어미의 손끝에서 선명해지고
아이의 혀가 담을 타고 넘어 간다
담 아래 아이는 왜 웃고 있을까
비는 어둠을 빌어 내리고
창문이 환한 방을 창밖으로 던질 때
아이가 잃어버린 발음들이 빈 방을 적신다
구렁이 비늘이 창문에 돋아난다
이만섭, 시어(詩語)들
신국의 말은 천 개의 귀를 지니고 있어서
아무도 모르게 구석에 가서 중얼거린다
그런데 벽과 벽 사이 주름 접힌 귀가 있다
다시 창가로 나와 내 흘린 말들을 주어 드는데
문밖의 새와 나무가 비켜보고 있다
새도 나무도 없는 빈들에 나가
소리치듯 혼잣말을 허공에 쏟아내는데
지나가던 바람이 채어 간다, 너의 것이 아니라는 듯
어디에도 함부로 내놓을 수 없는 말들
길을 걸으며 무시로 내뱉은 그간의 말들은
들풀이 듣고 샛강이 듣고 미루나무가 들었을 터이니
나의 산책길도 더는 안전지대가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저 귀들이 쫓아와
예리한 날로 나를 베이려 든다
입때껏 나는 궁핍을 채우기 위해
저들이 지닌 말들을 조탁하다가 허전함만 키웠는가
오늘은 강가에 가서 내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강은 이미 알아차린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내가 흘린 말들의 역순을 밟아
그간의 부끄러움을 거둬들이며
내 말을 관통하는 저들의 귀를 배워야겠다
우대식,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지옥을 유예하는 꿈을 꾸었다
내가 원한다면 다음 생애를 이어가며
지옥을 영원히 유예할 수 있다는 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영원 너머 한 번은 그곳에 가야 한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지상의 소시민이
이렇듯 큰 생각을 하며
지옥 아래 마을을 떠돈다는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추운 겨울 저녁
들기름 바른 김을
숯불에 굽던
옛집으로 돌아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눕고 싶다
오한 속에서 만나는
지옥의 야차와 일대의 싸움을 끝내고
오랜 잠을 자고 싶다
겨울날의 모든 저녁은 슬프다
봉당에 켜진 알전구처럼
겨울날의 모든 저녁이 나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