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 꽃들의 만(灣)
첫꽃은 첫꽃의 의지대로
끝꽃은 끝꽃의 의무대로
꽃이란 미래의 기억이라서
지나가는 소음이라서
갓 돋은 잎을 내모는 바람의 궤도는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꽃이란 주르륵 미끄러지는 것
차가워지는 것 그리고 말라가는 것
오가는 추(錘)처럼 계절에 들고
스치는 시침과 분침처럼 계절을 나라했거늘
움켜쥐는 손아 지나가다오
온몸으로 피워낸 내 꽃 밖의 허공은
네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서
아무것도 아닌 곳이라서
봄날에 겨워 나 툭 지거든
여름바다 한 그루 나 살던 뭍에 심어다오
나 묻힐 무덤에 가지 끝을 꽂아다오
캄캄했던 뿌리, 허공에 마저 피워낼 수 있도록
피고 또 지며 먼 길 달려왔으니
붉은 잎들아 일체로 흩어져다오
천 무더기를 피우고 뭉갰던 진흙꽃아
윤제림, 부석사에서
이륙하려다 다시 내려앉았소
귀환이 늦어질 것 같구려
달이 너무 밝아서 떠나지 못했다는 것은 핑계, 사실
사과꽃 피는 것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차일피일
결국은 또 한철을 다 보내고 있다오
누가 와서 물으면 지구의 어떤 일은
우주의 문자로 설명하기 어렵고
지구의 어떤 풍경은 외계의 카메라에는
담기지 않는다고만 말해주오
지구가 점점 못쓰게 되어 간다는 소문은 대부분 사실인데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소
어르고 달래면 생각보다 오래 꽃이 피고
열매는 쉬지 않고 붉어질 것이오
급히 손보아야 할 곳이 있어서 이만 줄이겠소
참, 사과꽃은 당신을 많이 닮았다오
곽효환, 안부
어느 날
오래전 당신에게서 안부를 묻는 메일이 왔습니다
광화문 근처를 지나며 문득 생각이 났다지요
아주 가끔씩 생각나는 나를
많이 좋아했던 것 같다며
수줍게 말꼬리를 흐리더니
여전히 출근하면 녹차를 마시며 찰떡을 먹고
메일을 읽고 신문을 펼치느냐고
덤덤하게 사소한 안부를 묻는 당신
나는 늘 한 발짝 늦게 깨닫고
하여 서툴게 서두릅니다
몇 번을 썼다 지우고 다시 썼다 지워도
나의 말은 맴돌고
나의 문장은 여전히 상투적이어서
‘아주’와 ‘가끔’ 사이의 경계 혹은
그 깊이를 가늠하지 못합니다
다시 당신은 소식이 없고
나는 다시 한없는 기다림으로 서성이다
전에 그랬듯이 시들다가 비켜가려나 봅니다
밤새 세찬 비바람 불더니
풍경처럼 가을이 왔습니다
강미정, 모래의 책
그 중 한 페이지를 넘기면
당신이 나를 업고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한 발 두 발 푹푹 발이 빠진다
이렇게 발 푹푹 빠지는 웅덩이 같은 시간을
이렇게 무겁게 휜 등짐 같은 계절을 업고
당신이 간다
푹푹 파인 무수한 발자국 위에
뚜렷하게 당신 발자국을 겹치며 간다
모래가 덮이는 발자국
떨림이 되어 스미는 발자국
내 등에 업힌 너의 무게는
깃털이 되어 가볍게 날아가는 무게지
두 발 푹푹 무겁게 빠지는 모래의 무게지
반은 날숨으로 반은 울음으로
가늘게 울리던 당신 목소리가
당신 등을 타고 내 가슴으로 전해진다
내가 당신에게 막막한 무거움일 줄을
당신을 업어보지 않고 어찌 알았겠는가
아득히 멀던 당신의 무게도
당신이 나를 업었던 한 페이지에 남아
점점 가벼워졌을까
나를 업은 당신만이 푹푹 두 발 빠지며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천양희, 이처럼 되기까지
복사꽃이 지고 나면 천랑성별이 뜬다지요
아침 무지개는 서쪽에 뜨고 저녁 무지개는 동쪽에 뜬다지요
8초에 103음을 내면서 숲을 노래로 가득 채우는 새가 있다지요
한 뿌리 여러 갈래인 나무에도 결이 있다지요
푸른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꽃피는 시절보다 낫다지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지요
누워 있던 땅이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벌떡 일어선 것이 가로수라지요
잘못 자란 생각 끝에 꽃이 핀다지요 그것이 시(詩)라지요
이 세상에 옛애인은 없고 이 세상의 꽃은 모두 아슬아슬하다지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지요
달밤이 있어서 인류는 생각하게 되었다지요
사랑할 때 사랑하고 생각할 때 생각하라지요
간절함에는 놀라운 에너지가 있다지요
가난에는 과거가 있다지요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은 점점 멀어진다지요
다음 어둠이 올 때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지요
그러니 수고로운 인생이여
내 몸 전체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