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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후식, 발자국 하나
어느 날 마을을 떠나 산을 오르는데
계곡 따라 눈물처럼 오르는데
물소리 뒤에 두고 산을 오르는데
보이는 것은 나무뿐 산은 보이지 않네
누가 놓고 갔을까 발자국 하나
산은 가려 있어도 거기 있고
눈물은 보이지 않아도 나는 거기 있네
박연준, 뱀이 된 아버지
아버지를 병원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아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곽효환, 벌목장에서
톱날이 쓸고 간 그루터기 위로
다시 생명이 움트고
마침내 붉은 꽃 한 송이 피었다
쓰러진 상처를 딛고 핀 희망
죽음을 딛고 일어선
그 굵고 선명한 눈물
이하석, 연어
돌아온다. 부끄럼 많은 언덕이 엎드려 지키는 여울의 길목으로
온다. 온다. 떼 지어 달리는 마라톤경기처럼
붉고 노란 유니폼 입은 선수들이 몰려온다
유도선이 없어도 제 생애의 무늬 속에 잘 각인된 길이
바다에서 강으로 들어, 에돌아, 돌아, 곧 바로, 상류에 이른다
연어의 헤엄은 서사적이다
그 시작과 끝이 예정된 길로 이어져 굽이치기 때문이다
강가에서 낚시질하거나 그물질하는 우리들이 잡아 올리는
장편 서사의, 쉬 끌어올려지지 않는, 퍼덕이는
긴 노정
기실 낚시질과 그물질로도 연어의 길은 헝클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연어들은 혼인 색으로 노랗게 붉게 보라로 장엄한 채
상류로 내처, 막무가내로, 치달아선 제가 아는 길의 꿈을 새로 낳는다
그게 서사의 후렴이 아니라 서사의 서두임을 우리는 안다
죽음으로 복제한 길. 그 어린 여행자들은
이내 떠난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 오래전부터 당연히 감당해온 처음의 제 길을 열며
풀어놓는다. 그냥 그대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멀리 나가는 강의 길이 길게 바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송재학, 햇빛은 어딘가 통과하는 게 아름답다
일 센티미터 두께의 손가락을 통과하는
햇빛의 혼잣말을 알아듣는다
불투명의 분홍 창이
내 손 일부이기 때문이다
국경선이 있는 손바닥은
역광을 움켜쥐었다만
실핏줄이 있는 종려 이파리는 어찌 얼비치는 걸까
구석구석 드러나는 명암이기에
손가락은 눈이 없어도 표정이 있지
햇빛이 고인 손톱마다
환해서 비릿한 슬픔
손바닥의 넓이를 곰곰이 따지자면
넝쿨식물이 자랄 수 없을까
이토록 섬세한 공소(空所)의 햇빛이 키우고
분홍 스테인드글라스가 가꾸는
인동초 지문이
손가락뼈의 고딕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