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효, 시
시란 참 하잘 것 없는 것이다
별 볼일 없는 것이다
삶을 돕기는커녕 방해만 한다
허영이며 사치며
한갓 장식품이 되기도 한다
못생긴 얼굴에 분을 바르고
모델인 양 으스대면서
세상의 말을 오염시킨다
조심하라
네 주술에 네가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김기주, 화병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 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 하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김창완, 대본 읽기
햇살 뿌연 회의실에 둘러앉아 대본을 읽는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임금을 읽고
빨간 추리닝을 입고 대감을 읽는다
백정은 운동화를 신었고
며느리는 슬리퍼를 달랑거리고 있다
대사가 없는 노복은 문자를 보내고 있고
조연출은 읽는 사람들을 눈동자로 좇아다닌다
공주는 계속 연필만 돌리고 있고
성질 급한 감독님은 지문을 읽다
배우들 대사도 따라 읽는다 더 큰 소리로
중전이 읽으면 대궐이 된다
할아범이 읽으면 초가집이 되고
의원이 읽으면 약방이 되고
포졸이 고함치면 포도청이 된다
바람이 불고 비 오고 눈 오고 세월 흐르고
말이 달리고 화살이 날아가고
영감이 죽고 아기가 나온다
그러나 바로 거기도 바로 그때도 바로 그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한낮의 풍경이다
전태련, 어느 생인들 꽃이 아니랴
봄꽃 시장에서 풀꽃화분 하나 들여왔다
자라나는 생물을 좁은 공간에 가두는 것이
전족당하는 여인 같다는
마음 이쪽을 건드리는 생각 하나
말 못하는 식물도 사랑한다 말하면
예쁜 꽃을 더 잘 피운다는
누군가의 얘기 생각나
자주 들여다보고 물도 흠뻑 적셔줬다
오늘 모처럼 흥건한 바깥
물이 넘쳐, 오히려 시들어가는
그를 보며
사랑도 해본 사랑이 잘하는 것인 줄 알겠다
사랑은 매번 다른 옷을 걸쳤어도
돌아보면 자라지 않는 아이 얼굴을 한
나 자신이었을 뿐
낙화의 두려움으로 늘 주춤거리는
더딘 꽃피우기
생의 마지막 한 번의 절창을 위해
한세월 가슴앓이 하는 가시나무 새도 아닌데
꽃은 피고 또 지고 그렇게 한생을 두고
몇 번을 피는 것을
절체절명의 그 한 번의 꽃이 있으리라
오늘도 꽃 문 뒤에서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
황구하, 기억
500원짜리 동전을 밀어 넣고
한동안 쌓인 메일을 읽는데
기차는 10분 연착될 거라고 했다
그리움이 언제 한 번이라도
제 시간에 도착한 적 있었던가
나도 누군가의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에서
한 생애 연장되었는지도 모를 일
잠시 녹슬어 끊어진 길 한끝
시큰한 발목 내려다보며
내안의 해와 달을 더듬어본다
해는 해대로 달은 달대로
빛이었다가 어둠이었다가 몸 바꾸는 동안
강물소리 길어 올리던
젖은 눈빛 이제 와 기억한다고
뭐 내 생애가 일순간 바뀌겠는가
그러나 무심하게 삭제한 메일 하나가
헐떡이며 달려오는 기차 불빛에
왜 둘둘 감겨 따라오는가
어스름 내리는 창문에 아로새겨져
끝내 글썽글썽 번져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