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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렬, 복사꽃 피는 봄날에
복사꽃
피는
봄날에
너와
나는
또 맹세했네
땅에서
하늘에서도
사랑한다고
복사꽃
다
지고
우리 모습
간 데
없어도
아픈 줄도
몰랐네
민용태, 각시패랭이꽃
잊어버리고 길을 가다 문득 발에 밟히는 꽃
각시패랭이꽃
진동으로 우는 작은 핸드폰 같은
너는 잊고 살던 나의 풋각시
하두 작아서 눈섭에 넣기도 아픈
내 사랑아
시장과 일상과 전장 속에
가까스로 푸르름으로 살아남아
꽃보다는 가냘픈 줄기가 다인
각시패랭이꽃
이따금 그 작은 보랏빛 미소가 나를 반길 때
너는 눈물보다 한 방울 아래에서
끝없이 나의 사랑을 덥힌다
류시화,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 새의 날개들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 치면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 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김인육, 목련 일기
4월아, 나는 왔다
데미안과 어린왕자와 갈매기 조나단을 찾아
견딜 수 없는 치욕을 뚫고 나는 왔다
사실, 삶은 총구같이 위태로운 것
타앙ㅡ, 찰나에 세계는 소실되고 마는 것
동백처럼 심장이 꽃 지더라도
4월아, 나는 끝내 왔다
겨울 모서리
할퀴어진 생채기마다 쿵쿵 피가 돈다
꽃들이 핀다
심장이 뛴다
피가 돈다, 네가 핀다, 내가 뛴다
반짝, 별들이 빛난다
사랑은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치하는 것
천둥을 포획하여 쿵쿵 심장고동으로 길들이는 것
기꺼이 목숨 다하는 순교인 것
4월의 눈동자는 그래서 깊고 그윽하다
나는 생채기마다 고운 꽃등을 달고
발목이 잘리면서도 자꾸만 네게 간다
왜냐고 묻지 마라, 꽃아
저기, 성호를 그으며
서쪽으로 향하는 별들의 궤적을 따라
나는 또 가고 갈 뿐이다
이 잔인한 계절
너를 목숨처럼 안고
손택수, 살가죽구두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캉가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갈 수 없는
맞춤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