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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수, 접었다
반으로 접었다
내가 그에게 준 마음을
두 개의 접힌 선이 직각이 되게 또 반으로 접었다
한 번 더 또다시
한 번 더 더 접어나갔다
그런 식으로 오십 번 백번을 접고 또 접었다
기한은 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은 무제한이다
그가 내게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접어놓을 수 있다
되돌아온다면 그에게 접었던 마음을 하나씩 펴보이리
강신애, 신례원
열차에서 내린
물빛 원피스는 낯설었지
너는 익숙한 수조
익숙한 음향에서 나오지 않았지
처음 와본 시골 역
하얀 길을 무작정 걸어
지루한 호스가 뱀처럼 기는 허름한 카페
커피를 두 잔째 주문하고
나는 먼 지평선의 중독
소멸에 대한 중독을 생각했지
너는 엉킨 테잎을 쭉쭉 펴고 있었지
물앵두 그림자 어른거리는 너의 편린
사과 잎이 마르고
이끼 낀 화분에 앙금처럼 가라앉는 고요
막다른 벽에서 회유하는 물고기들이
치렁한 초록 나뭇잎 사이를 헤엄쳐
커다란 저수지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지
작은 역, 다시는 지나갈 수 없는
윤희상,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나주 장날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높게 쌓아놓은 채 다듬고 있다
그 옆을 지나가는 낯선 할아버지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을 남기고 간다
"그것을 언제 다 할까"
그러자, 할머니가 혼잣말을 한다
"눈처럼 게으른 것은 없다"
박후기, 흠집
이가 깨져 대문 밖에 버려진 종지에
키 작은 풀 한 포기 들어앉았습니다
들일 게 바람뿐인 독신(獨身)
차고도 넉넉하게 흔들립니다
때론
흠집도 집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상국, 물 속의 집
그 해 겨울 영랑호 속으로
빚에 쫓겨온 서른세 살의 남자가
그의 아내와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가던 날
미시령을 넘어온 장엄한 눈보라가
네 켤레의 신발을 이내 묻어주었다
고니나 청둥오리들은
겨우내 하늘 어디선가 결 고운 물무늬를 물고 와서는
뒤뚱거리며 내렸으며
때로 조용한 별빛을 흔들며
부채를 청산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인근 모래기까지 들리고는 했다
얼음꽃을 물고
수천 마리 새떼들이 길 떠나는 밤으로
젊은 내외는 먼 화진포까지 따라나갔고
마당가 외등 아래서
물고기와 장난치던 아이들은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애들이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의 뺨을 적신다
그래도 저녁마다
울산바위가 물 속의 집 뜨락에
오래 가는 놀빛을 떨어뜨리고 가거나
산 그림자 속 화엄사 중들이
일부러 기웃거리다가 늦게 돌아가기 때문에
영랑호는 문을 닫지 않는 날이 많다
그런 날은 물 속의 집이 너무 환하게 들여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