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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희, 생각은 꼬리가 길다
밀려드는 생각에는 순서가 없지
생각은 낙타가 걷는 속도로 걷는 것 같아
생각이 길처럼 길어도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은 없는 거지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바람만 생각하자해도
생각은 언제나 나를 받아내는
나는 생각의 자식
바람이 불 때마다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부터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던 때를 생각하는 거지
평생을 생각만큼 살지 못했으므로
나는 늘 생각을 들고 살지
잘라도 잘라도 생각은 꼬리가 길어
생각 끝에 길이 있는 것이지
신현림, 봄이 아픈 사람
너는 가고 봄이 온다
너없는 봄은
거울 깨지듯 아프고
손은 미친 듯이 늘어나서
닿을 수 없는 팔은 꼬이고 꼬여서
연기처럼 종소리처럼
그리움은 마냥 퍼져가서
차가운 손이구나 가슴이구나
따스히 네 손을 잡고 싶어서
네 눈 속에 출렁이던
아름다운 황토길이 보고 싶어서
또 다시
다시 한 번
네 곁에 있고 싶어서
이운진, 슬픈 환생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준단다
다음 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얻었나
거짓말 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외로운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양선희, 하염없이
누가 반쯤 가린 세상을 보려고 나는
창을 닦기도 하고
일간지와 주간지와 월간지와 계간지를
정기구독해서 숙독하기도 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경청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소주를 나눠 마시며
역사와 광기를 얘기하기도 하고
담배연기로 혀끝에 감기는
하루를 곁눈질해 보기도 하고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곳으로
총알택시를 타고
휙, 휙, 휙, 휘익
풍경들을 스쳐 보내고 가보기도 하고
처진 걸음으로 돌아와 다시 내 몫의 죄를 끌고
이 골목 저 골목 다니다가
짓무른 다리에 약을 바르며 나는
누가 어디론가 보내 버린 이곳의 절반 이상이
내용증명으로 배달되어 오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화은, 아는 병
썩은 어금니를 치료하는데
마취제를 충분히 놓았으니 의사는
아프지 않을 거라고 한다
눈감고 아
입 벌리고 있으면 그만인데
그만인데, 자꾸 눈물이 난다
아프냐고 의사는 몇 번인가 물었지만
아프지 않아도 눈물이 날 수 있다고
아 입 벌리고 있으니 말해줄 수가 없다
엄마는
아는 병은 무섭지 않다고 했다
썩은 어금니는 아는 병이다
오래 친한 병이다
너무 친해서 썩은 병이다
이 썩은, 우정 같은 병이
그 뿌리를 도려내며 내게
명분 하나를 슬쩍 쥐어준 것이다
자 이제 울어라
위패 같은 병든 이빨 하나가
내 눈물의 물꼬를 틔워준 것이다
울어도 되는 명명백백한 처방을 받았으니
모르는 병 백 개 천 개를
아는 병 하나가 지금 다스리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