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군다나 제대할때 땅 대신 받는 돈이 부유한 생활을 할 정도의 금액은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는 군단병이 20년 복무한 후 받는 금액은 3,000데나리우스였다. 이 돈은 아무리 좋게 계산해도 8~10 유게라정도의 땅 밖에 살 수 없는 금액이었다.
(1 유게라는 약 2~3에이커정도이니 8~10 유게라는 9.600평~1만 2천평 정도를 생각하면 된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 후 옥타비아누스의 제대군인들이 일인당 40 유게라의 땅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적은 양이다.
카라굴라 시기 5,000데나리우스로 증가되었지만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기원후 14년 군단 반란의 주동자인 페르케니우스가 내뱉은 제대군인들이 질퍽한 늪지대나 메마른 언덕 따위를 경작하고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는데 이러한 금전적인 측면의 불만은 군복무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기피 현상으로 이어 졌다.
가령 아우구스투스 시기 어떤 기사 계층의 남자가 자신의 어린 두 아들을 군복무에 부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린 일이 있었다. 또 기원후 9년 바루스의 패배로 3개 군단이 없어진후에는 지원자가 부족하여 보충하지 못했다. 기원후 23년에는 만기 제대 할 군인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새로운 군인을 모집했어야 했지만 역시 지원자가 부족하였다.
이러한 지원자 부족 현상은 군단병의 출신 지역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군단병 중 이탈리아인의 비율은 아우구스투스에서 카리굴라 시기까지 약 65%였으나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시기에는 48%로, 플라비우스 시기에서 트라야누스 시기까지는 21%로 감소하였다.
봉급과 제대시 받는 돈에 대한 불만은 곧 군 생활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게다가 제정기의 전쟁 지역, 특히 게르만 지역과 다키아 지역은 많은 전리품을 기대할 수 없는 곳으로 기피 지역중 단연 최고를 달렸다.
더욱이 제국이 확대되면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장기간 복무해야 했기 때문에 복무 여건 또한 상당히 좋지 않았다.
로마시나 이탈리아 내에서 16년 복무하는 근위병과 비교할 때 군단병의 복무 환경은 정말 열악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근위대의 복무를 선호하고, 군단의 복무를 기피하는 현상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로마 군단 내에 속주 출신 군인들의 비율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기도 하였다.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