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효임, 치매 걸린 시어머니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권기만, 내가 좋아하는 과일
따뜻함도 과일처럼 열릴 때가 있다
따뜻하다를 따면 몇 개의 계절이 주렁주렁
키를 늘린 나무로 열린다
따뜻하다를 한 입 먹으면
남도의 저녁이 목젖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울음에 매달려 있는 노을을 따서
등 뒤로 감추면 밤이다
밤에도 따뜻함은 밝아서
불인양 쬐다보면
몸속이 동그랗게 부푼다
목소리가 환하다면
따뜻하다를 따먹었다는 것
먹다가 손 비벼보면
파란 귀가 푸드득
몇 개의 밤을 날아다닌다
봄볕에 헹군 나무에
손을 걸어 놓으면
달이 둥글게 익어가는 시간
따뜻함도 과일처럼 열릴 때가 있다
박지웅, 소금쟁이
비 개인 뒤 소금쟁이를 보았다
곧 바닥이 마를 텐데, 시 한 줄 쓰다 마음에 걸려
빗물 든 항아리에 넣어두었다
소금쟁이가 뜨자 물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이 되었다
마음에 소금쟁이처럼 떠 있는 말이 있다
가라앉지도 새겨지지도 않으면서 마음 위로 걸어다니는 말
그 말이 움직일 때마다 무심(無心)은 문득 마음이 되었다
잊고 살았다 그러다 열어 본 항아리
그 물의 빈칸에 다리 달린 글자들이 살고 있었다
마음에 둔 말이 새끼를 쳐 열 식구가 되도록
눈치 채지 못했다, 저 가볍고 은밀한 일가를 두고
이제 어찌 마음이 마음을 비우겠는가
내 발걸음 끊었던 말이 마음 위를 걸어 다닐 때
어찌 마음이 다시 등 돌리겠는가
속삭임처럼 가는 맥박처럼 항아리에 넣어둔 말
누구에게나 가라앉지 않는 말이 있다
김순아, 빗물로
네가 돌아오는구나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소리처럼
네가 일으키는 발소리에 나뭇잎이 떤다
그리 못 견디더니
그리움 깊어지면 못 할 일도 없다더니
첩첩 산을 지나 거센 강 물결 건너
네가 돌아오는구나 빗물로 오는구나
물기 젖은 눈으로 그리움 찾아
물기 젖은 눈으로 사랑하려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먹구름의 하늘
밀고 밀어 네가 돌아오는구나
그리워 길길이 자란 풀들 더듬어
시퍼렇게 멍든 숲을 흔들며
네가 돌아오는구나 빗물로 오는구나
김성호, 반환점
호수처럼 커보이던 고향동네 저수지가
나도 모르는 사이
웅덩이처럼 작아져 있었고
만국기 펄럭이던 드넓은 학교운동장도
눈을 의심할 정도로 비좁아 있었고
멀게만 느껴지던 큰집동네도
어느 날부터 지척의 거리로 다가와 있었다
아무리 잰걸음으로 달려도
좀처럼 거리가 좁혀지지 않던 해
해가 점점 커져 보이더니 이제는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커야 굉장해 보이고
한눈에 선뜻 들지 않아야 신기하던 사물들이
내가 나이 들고 커가면서 가깝게 다가왔다
마음의 창(窓)이 살아온 세월만큼 커졌다 해도
다 크지 못하고 여물지 못한 몸뚱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가을, 절벽 같은 하늘 아래
고스란히 노출된 내 가슴 어디선가
낯선 바람이 허락 없이 길을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