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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KAYwQXxrHWU
최서진, 손금
상처 하나씩 매달고 태어나는 금
참견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 완강하게 금 하나 다시 낳는 일
균열의 틈새 사이로 누군가 사납게 꽃을 꺾어 버린다
손바닥이 불에 덴 듯 곁도 없이 금하나 생겨났다
밖으로 나가는 애인
나는 안쪽에 서서 잃는다는 것에 집중했다
당신의 손바닥에 내 손바닥이 닿자 홧홧한 벼락이 일었다
가슴을 부풀리며 둘레가 축축해졌다
살아가는 일은 악수할 때 상처를 들키는 일 아닌가
오정국, 새
여전히 불투명한 피의 술잔처럼
국경을 넘어가는 두어 가닥 전선처럼
삼복염천의 태양을 입에 물고 간다
밭고랑을 움켜쥔 옥수수 발톱처럼
전망 좋은 들녘의 낙뢰 맞은 나무처럼
무너지면서 견디는
죽음의 힘으로
저의 족쇄와 사슬을 발목에 걸고 간다
혹한기 훈련의 낙오병들, V자의 비행편대를 이룬 채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고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의 빗줄기를 기다려
일제히 꽃을 피우는
사막의 선인장처럼
삽시간에 백리를 달리고 천리를 뻗는다
뿌리와 천리를 한 걸음으로 묶는다
사막의 꽃처럼
천 년 전에도 만 년 전에도 지났던 길을
낙타와 두개골과 양피지를 굴리며 간다
그렇게 날아가서 다시 모이는 곳
지상의 모든 책이 불탄 자리다
이근배, 절필(絶筆)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들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강연호, 가족
거실에 모인 잠이 깊다
이백 개가 넘는 채널이 있으니
끼니는 그것으로 족하다
리모컨은 묵주
채널을 돌릴 때마다
웅얼웅얼 경이 경을 불러 모은다
두 시에도 세 시에도 뉴스는
상자 속의 미궁을 미궁 같은 세상을
거기 놓친 실끝이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줄 듯 말 듯 혼자 심각하다
휴일 오후가 불러온 낮잠
천근만근 무겁다
안방까지 가는 길도 천산북로다
가족, 내력이 깊은 흉터
저마다 세상이 곤하고 가려워
코를 골며 허벅지를 긁으며
잠 속의 잠 속의 잠 속의 잠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잠의 겹상자
꿈의 겹상자
현관의 신발들은 뒤꿈치를 드는 법이 없다
집에서만큼은 이쪽저쪽 뒤집어지고
아무렇게나 나뒹굴어야 한다
김경미, 수첩
도장을 어디다 두었는지
계약서를 어디다 두었는지
구름을 어디다 띄웠는지
유리창을 어디다 달았는지
적어놓지 않으면
다 잊어버린다
손바닥에 적기를 잊어버려
연인도 바다도 다 그냥 지나쳤다
발뒤꿈치에라도 적었어야 했는데
새 구두가 약국도 그냥 지나쳤다
시간도 적는 걸 잊자
한 달이 어디선가 썩어버리거나
토끼똥같이 작고 새까매졌다
때론 살아 있다는 것도 깜빡 잊어버려
살지 않기도 한다
다만 슬픔만이
어디 따로 적어두지 않아도
기어이 눈물 자국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