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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모래
봄녘
보도블록을 새로 깐 자리에
인부들이 모래를
흩뿌려놓았다
틈을 메운다는 것을 저런 것일까
그냥 가만히
흩뿌려놓고
가는
비
한석호, 이슬의 지문
이슬에 젖은 바람의 결을 만지고 있으면
시간의 발자국소리 쪽으로 동그랗게 귀 모으는
나의 옛집이 문을 여는 것만 같다
담장이 붉은 그 집 정원에 앉아 있으면
낡은 기억을 벗어던지는
문패의 거칠고 주름진 손이 어둠 속에서도 읽히고
제상문(蹄狀紋)의 촉각 끝에서 피어나는
맨드라미, 채송화, 분꽃들
한창 역사중이다
가끔은 해독되지 않는 기억들 저편에서
저 사춘기적 보리밭과
첫사랑 데리고 떠나간 간이역이 궁륭(穹窿)처럼 일어나
나를 출발점으로 데려가려한다
그럴 때 나는 원고지를 꺼내어
그대에게 길고 긴 안부를 물으리라
밀려오는 거대한 적막과
그 적막 사이를 노 저어 다니는 시간의 사자(使者)들과
채울수록 더 비어만 가는 텅 빔과
풀수록 더 꼬여만 가는 생의 어지럼증과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먹구름 너머에 대해서
이슬의 지문을 조회하면 누군가가
내 기억의 언저리에서 동그랗게 손 모으고 있다
순장한 나의 아틀란티스 엿보려
저 투명하고 둥근 신의 렌즈로 날 길어 올리고 있다
이상윤, 섬에 관한 짧은 명상
섬은
혼자 있어도 섬이고
전깃줄 위의 새들처럼
모여 있어도 섬이다
한 번이라도
그리움에 빠져본 사람은 안다
혼자가 아니면서도
지독한 외로움울 느낄 때
사람은 누구나
섬이 된다는 것을
멀리 있는 것들은
다 꽃이 되고
꽃이 되어 붉어진다는 것을
작아서 섬이 아니라
외로워서 섬이다
조말선, 열두시보다 더
열두시로 가고 있습니다
열두시가 있는 까페에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마시기로 했습니다
소엽풍란의 꽃대는 이미 열두시입니다
늦었나요
신호등은 이미 열두시입니다
열두시로 가고 있는 차들 때문에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습니다
나는 길가에 살고 있고
길 안에서 살아왔습니다
모두 열두시로 가고 있습니다
열두시의 거품이 부풀어 오릅니다
지금은 열한시 사십이분이므로
열두시는 까페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나는 길가에서 살아왔는데
지금은 길 안에 있습니다
열두시로 가는 길가에 마끼아또 거품이 묻습니다
입가에는 거품만 묻습니다
나는 거품처럼 길가에 살고 있습니다
까페에서 열두시를 기다립니다
약속은 벌써 열두시입니다
티슈보다 가볍게 열두시의 거품이 부풀어 오릅니다
티슈로 입가를 닦습니다
송은영, 겨울 과메기
낡은 외투를 걸친 초라한 노숙자같이
설한풍 되받아치며 그렇게 견디고 있다
치욕의 모서리를 뽑아 코뚜레를 만들었다
난무하듯 헝클린 덕장 곳곳에서
내장까지 훑어낸
납작한 뱃가죽을 드러내고 바다를 버린다
바람은 제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좀처럼 요약되지 않는 몸은
공복을 채워줄 누군가를 위한 것인가
밤새워 내리는 눈발을
미친 듯이 받아내며
완성된 또 다른 생
뼈를 추려낸 몸은 찬란한 지느러미를 키운다
축문처럼 지나가는 파도 소리에
살갑게 지나온 길
돌아볼 새도 없이
등 푸른 육신을 쫀득쫀득하게
해탈한 겨울 과메기
풍경만 남은 수행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