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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산, 전철 안 홍해
그가 저쪽 칸에서 이쪽 칸으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람들 모두 양쪽으로 갈라서며 길을 열어준다
마치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것과도 같이
우리에게 음악을 들려주며
그는 우리들 사이를 건너고 있다
이 끝에서 저 끝으로
건너는 음악의 홍해
여기저기 때로는 동전 한 닢, 때로는 지폐 한 장
던져주는 사람들 사이
동전도 지폐도, 또 세상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그는 다만 구슬픈 음악으로
이 칸에서 다시 저 칸으로
기적이 없는 시대의 기적, 꿈꾸듯
그렇게 건너가고 있다
김후란, 가족
거치른 밤
매운 바람의 지문이
유리창에 가득하다
오늘도 세상의 알프스산에서
얼음꽃을 먹고
무너진 돌담길 고쳐 쌓으며
힘겨웠던 사람들
그러나 돌아갈 곳이 있다
비탈길에 작은 풀꽃이
줄지어 피어 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돌아올 가족의 발자국 소리가
피아니시모로 울릴 때
집안에 감도는 훈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서안나, 립스틱의 발달사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은
보석을 갈아 눈과 입에 발랐다
립스틱의 기원이 되었다
고대인들은 빛나는 눈과 입술로 별에 닿고 싶어 했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러므로 날개는 별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내 눈과 입술에
별이 뜨고 날개가 돋는다, 란 논법엔 오류가 없다
클레오파트라는 딱정벌레와 개미 몸을 짓이겨
입술을 칠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입술에 굶주린 곤충들이 날아들었다
여인의 입술을 위해 쉽게 목숨을 버렸다
그러므로 죽음 속에서 립스틱은 빛난다
는 문장도 용서될 수 있다
당신이 별을 바라볼 때 애잔해지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선 욕망의 얼굴과
잠시 마주쳤기 때문이다
욕망은 순결한 육체를 천천히 날아올라
별들 사이에서 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아침마다 당신의 입술에 날개를 그려 넣는 것이다
입술을 칠하며 별을 건너는 것이다
당신이, 반짝인다
강경호, 푸른 도라지꽃
다이아몬드 모양의 노린재가
꼬리를 물고
푸른 꽃을 피운 도라지 잎사귀에 달라붙어
수액을 빠는지 꼼짝 않는다
농약을 뿌릴까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금빛 알을 낳는 중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담배씨만한 목숨들이 꾸물거린다
그 사이, 도라지 잎 노린재떼가 갉아먹어
뼈만 남은 생선 같은데
몸이 근질근질 하지도 않는지
도라지는 가장 아름다운 비명으로
푸르게 노래만 부르는 것이다
류시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