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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을 연재하고자 합니더. 좀 거시기한 낱말들은 ㅇㅇㅇ으로 자체 모자이크 처리하였사오니, ㅇㅇㅇ에 적당할 것 같은 낱말들을 대애충 낑가넣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더. ㅇㅇㅇ의 정체가 어렵다 하시는 분들은 모르시더라도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사오니 그냥 마음 편하게 읽으시기 바랍니더. 그러나 ㅇㅇㅇ이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잠도 안 오고, 죽을 것만 같다 하시는 분은 저에게 텔레파시를 쎄리시기 바랍니더. 그러면 저도 텔레파시루다가 답을 전송하겠습니더.
아무쪼록 긴 글이지만 끝까장 인내하시며 읽어주시기 바랍니더. 복 받으실 겁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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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자리(1)
세상에! 아빠였다. 분명 아빠였다. 아니, 아빠가 어쩜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을까? 언제 본 적이 있었던가 싶은 아빠의 모습이었다. 모텔이 밀집한 골목에서 아빠가 어떤 여자와 팔짱을 끼고 웃으면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한 나는 얼떨결에 오던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공장의 작업상황을 점검하고 지하철을 타러 가던 중의 일이었다. 확실했다. 아빠는 그 여자와 모텔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니라면 왜 그 골목에서 나왔겠는가? 그런데 나는 아빠를 부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후의 곤혹스러운 장면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가슴이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은 이런 경우에 쓰는 것인가. 한순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웃음 섞인 아빠의 목소리와 여자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엄마가, 엄마의 분노하는 얼굴이 떠올랐다. 일그러진 동생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빠는 나를 봤을까? 못 본 것 같았다. 봤다면 그렇게 웃을 수 있었겠는가?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나는 그들을 따라갔다. 아빠에게는 어쩔 엄두도 못 내면서 오로지 여자에게 아빠를 만나지 못하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영화 속의 첩보원처럼 조심조심 뒤를 밟았다. 그들은 지하철 역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헤어졌다. 숨어서 보는 내가 부러울 만큼 그들의 작별은 각별했다.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처지를 의식해서였는지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여느 젊은 연인들보다 더 애절해 보였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여자가 먼저 돌아섰다. 아빠는 그 자리에서 여자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여자가 저만큼 가다가 돌아보고 웃으며 아빠에게 손짓으로 어서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갔고, 여자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아빠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허겁지겁 여자를 뒤쫓아갔다. 여자는 어렵지 않게 눈에 띄었지만 지하철이 문을 열고 있었다. 여자를 멈춰 세울 기회를 놓친 나는 가까스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낮시간인데도 그리 한산하지 않아 여자의 옆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나는 일단 가뿐 숨도 돌릴 겸 사람들이 좀 적어지면 다가가서 말하리라 생각하면서 여자의 대각선 방향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그 ‘일단’이 문제였다. 내게 강단이 있었다면 곧바로 여자에게 ‘우리 아빠를 만나지 말라!’고 말했어야 했다. 이후 나는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갈수록 지하철 안은 복잡해졌고,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딱 잡아뗀다면, 아니면 적반하장으로 ‘그런데? 어쩔 건데?’ 하고 대든다면 어쩔 것인가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엄마를 대신해서 여자의 뺨이라도 때리고, 머리끄덩이라도 잡아채야 하지 않을까. 욕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마음 뿐이었다. 분노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그럴 용기는 내겐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못했을 것이다. 엄마라면 어땠을까? 엄마와 나는 애초에 입장이 다르겠지만 나와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도 엄마는 딸의 이름으로 처절히 응징했을 것이다. 오히려 엄마는 당사자인 나보다도 더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들을 발견한 처음부터 숨지도 않았을 것이며, 여자는 머리부터 휘어잡힌 채 어디가 부러져도 부러졌을 것이고, 아빠마저 성치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 여자의 딸이라면 당연히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 엄마를 많이 닮은 지효와 지수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아빠의 유순한 성정을 많이 닮았고, 겁이 많고 소심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그 순간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원망은 아빠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왜 이러는가? 아빠에게는 엄연히 엄마가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부끄럽지도 않은 걸까? 다 큰 딸들을 두고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더군다나 나는 결혼할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도대체 뭘 믿고 이러는가?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이런 엄청난 짓을 하는가 말이다.
나는 여자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빠는 여자의 무엇이 좋은 것일까? 엄마보다 예쁘지도, 젊지도, 세련되지도 않았다. 옷차림은 단정했지만. 여자는 스마트폰으로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아빠와 연락하는 것일까? 얼굴엔 내내 미소가 가득했다. 원하는 좋은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지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공장을 나서면서 바로 들어간다고 보고를 해놓은 것이었다. 벌써 들어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사무실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노처녀 히스테리일까? 평소에도 ‘잔소리대마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김부장은 내 청첩장을 회사 게시판에 올린 후부터 부쩍 더 나에게 트집을 잡는 것만 같았다. 시간은 자꾸 흘렀고,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다가가서 ‘우리 아빠 만나지 말라!’ 그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그것을 못하고 있었다. 이제 아빠에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포기하고 사무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내려야지, 이번엔 내려야지 하면서 내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여자가 내릴 채비를 했다. 후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기회가 온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탄 지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여자를 따라 내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내린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어떤 눈치를 챈 것인가. 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금세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거의 뛰다시피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가 들어간 곳은 바로 지하철 입구에 붙은 작은 꽃집이었다. 간판엔 ‘희망플라워’라고 적혀 있었다. 여자의 가게인 모양이었다. 다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화장실이 급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부딪치는 거야! 금세 꼬리를 내리려는 용기를 부추기며 꽃집의 문을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박상미씨의 전화였다.
“대리님, 어디세요? 부장님이 왜 아직 안 들어오냐고 난리 났어요!”
“응. 그게..... 갑자기 배가 아파서 말이야. 곧 들어간다고 상미씨가 잘 말씀드려 줘! 부탁해!”
달리 떠오르는 핑계도 없었다. 김부장에게서 날아올 각종 잔소리종합선물세트를 생각하니 하늘이 노랬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 옷에 커피 쏟은 일부터 시작할 게 뻔했다.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하늘도 놀랄 일에도 나는 김부장의 잔소리를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랬다. 순식간에 나는 적 앞에서 무기를 놓쳐버린 병사처럼 전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여자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두려웠고, 무턱대고 만나기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만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버리고 있는 나였다. 간판에 있는 전화번호만 입력하고 돌아섰다.
—2편에 계에속됩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