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현수, 꽃
꽃이니까
꽃이므로
향낭 없는 꽃잎에도
그러므로
두근거리는 심장이 있다
상처끼리 모여
몸 기대고
다독이며 왕국을 펼친다
허공에 나를 심는다
푸른 피 돌고
그러므로 무감각했던
심장이 두근거린다
공중 높이 들어올린
꽃잎들
피고 있다
지고 있다
박건한, 어느 날 갑자기
이슬은
아침의 풀잎세계를 돌돌 말아
지평선 아래
어느 마을 마당에
지도이듯 펼쳐 놓고 사라지고
갈매기는
저녁의 타는 놀 한 자락 끌어다
수평선 아래
바다 맨 밑바닥에
비단 필이듯 펼쳐 놓고 사라지고
사람은
한평생 그 무엇 한 끝에 붙잡고
땅속 깊은 어는 망각의 골짜기로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이듯 무너지듯 사라지고
사라지고 말면 그뿐
그런데
과연 그 무엇은 무엇이며
무엇이 혼불 되어
하늘나라로 다시 치솟는 것일까
신덕룡, 소나기
뚝 뚝 끊어 뱉는 파열음이다
귀를 기울일수록
어둠의 끝에서 점멸하는 불빛 같아
멀고 아득한 바깥부터 가볍게 흔들어 놓는다
뒤란에서 어깨를 들썩이는 어머니
말이 아닌 뜨겁고 길고 가늘어서 홧홧거리는
목울음이다. 불협화음이라서
가만히 눈 감고 소리의 갈피를 찾아가거나
장단을 맞출 수는 없지만
가슴 안쪽으로 파고들어 둥 둥 둥 고동치던 소리가
어떤 줄기에 발이 걸렸는가
넘어져서는 오래 두고 눌러 붙은 피딱지를
확, 뜯어버리는
길바닥에
후드드득 쏟아놓는 저 숱한 파문들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뜨겁고 깊고
단호하게
순간순간을 사랑하며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
현실은 딴전
딴전이 있어
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
늘 딴전이어서
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
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
그래도 세계는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단호하고 깊고
뜨겁게
나를 낳아주고 있으니
강경호, 나무의 신발
나무의 신발은
생을 견인하는 비퀴이다
생을 떠 먹여주는 밥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은 신을 수 없는 것이
신발이다
나무는 주스를 마시듯
신발을 빨아 마신다
먼 길을 가는 사람들처럼
털신 같은 두꺼운 신발을 신고
터벅터벅 산을 오른다
공사장 부근에서 발바닥 드러낸 채
나무 한 그루 드러누워 있다
어깻죽지 부러지고
신발은 벗겨져 있는데
검은 연기 내뿜는 거대한 포크레인이
으르렁대며 연신 땅을 팔 때마다
맨발의 나무들이 뒤집힌다
한창 마음이 뜨겁던 시절
목매단 졸병의 차디찬 발에
입김 호호 불며 군화를 신겨준 적이 있다
저승길 발 부르트지 말라고
알맞은 치수의 군화였다
길을 가다가
뜻하지 않게 생을 다친 나무를 만날 때마다
치수 낭낭한 신발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