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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는 이름을 갖지 못한 계절이 되었다
게시물ID : lovestory_888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2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1/28 08:25:48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aMU8CJwdF_k






1.jpg

복효근어떤 종이컵에 대한 관찰 기록

 

 

 

그 하얗고 뜨거운 몸을 두 손으로 감싸고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듯

사랑은 이렇게 달콤하다는 듯

붉은 립스틱을 찍던 사람이 있었겠지

 

채웠던 단물이 다 빠져나간 다음엔

이내 버려졌을

버려져 쓰레기가 된 종이컵 하나

담장 아래 땅에 반쯤은 묻혀 있다

 

한때는 저도 나무였던지라

낡은 제 몸 가득 흙을 담고

한 포기 풀을 안고 있다

버려질 때 구겨진 상처가 먼저 헐거워져

그 틈으로 실뿌리들을 내밀어 젖 먹이고 있겠다

 

풀이 시들 때까지 종이컵의 이름으로 남아 있을지

빳빳했던 성깔도 물기에 젖은 채

간신히 제 형상을 보듬고 있어도

풀에 맺힌 코딱지만 한 꽃 몇 송이 받쳐 들고

소멸이 기꺼운 듯 표정이 부드럽다

 

어쩌면 저를 버린 사람에 대한

뜨거웠던 입맞춤의 기억이

스스로를 거듭 고쳐 재활용하는지도 모를 일이지

1회용이라 부르는

아주 기나긴 생이 때론 저렇게 있다







2.jpg

맹문재나는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다

 

 

 

대학교수의 손이 왜 이래

 

악수를 하는 사람들은

나뭇등걸처럼 갈라진 나의 손등을 보고

놀라기도 하고 놀리기도 한다

나는 정답 같은 당당함을 가지려고 하면서도

그때마다 움츠러든다

 

내가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는 이유는

위생적으로 아이들에게 밥을 해주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닮고 싶은 손이 있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의 노동자와 흰 손의 사나이에 나오는 사나이는

당국의 눈치보다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육 년이나 쇠고랑을 찼고

마침내 교수형을 선택했다

 

나도 빈 요구르트병 같은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출석 확인을 하듯 일기를 쓰고

연서를 하고

때로는 집회에 나가지만

흰 손의 사나이가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최소한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3.jpg

정푸른눈사람

 

 

 

나의 체온이 당신의 날개라고 말하는 순간

생이 증발하기 시작했다

겨울의 발성에 갇힌 당신은 등을 보였고

나의 두 팔은 이제 곧 종착역에 닿을 듯 허우적거리다

멈추었다

정지 화면 속으로 빠르게 수혈되는 찰나들

다하지 못한 말들이 링거액처럼 똑똑 떨어지고

그림자는 침묵의 표본처럼 누워 있었다

녹아내리는 당신의 시제는

과거를 지나 더 먼 과거로 흘러가고

나는 이름을 갖지 못한 계절이 되었다

 

기억은 시간을 덮고 있는 살얼음

그 속에 휘청거리는 나를 휘묻이로 심는다

자욱한 폭설로 흩어져 내릴 기억 속에

뿌리를 내린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녹아든 내 심장의 근황을 뭉치면

다시 살아오는 체온

 

사람의 이름으로는 만질 수 없는 간절기의 시간이 흘러간다







4.jpg

도광의모량역

 

 

 

산수유꽃 개나리 하도 피어

역사(驛舍지붕도 노란꽃이 핀다

열차가 모량역을 지날 때

작은 못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까치가 앉았다 날아가는 순간

나뭇가지 가늘게 떨리다가

찰방대는 못물에 잠긴다

산수유꽃 개나리 하도 피어

마을 지붕들도 노란꽃이 핀다

열차가 모량역을 지나면서

까치집이 못물에 잠기면

박목월 선생을 생각하는

내 마음도 꽃이 피어 물에 잠긴다







5.jpg

김상윤반월성터

 

 

 

은관모 닮은 구름들 빈 터 위로 떠가고

한 쌍의 돌계단 쓸쓸한 기호로 서 있다

 

어느 왕가의 성이었을까

바람꽃으로 설레던 날들이

나비가 꿈 피어올리듯

굴뚝보다 연기되어 올라 갔으리

 

지금은 그저 바람 속 먼지 날아와 앉고

달빛 아래 이슬만 꿈꾸다 갈 뿐이지만

이 계단에서 나는 그대를 기다렸던가

천 년 전부터 그대는 여기서 나를 기다려 왔던가

가슴 속 비파 줄이 울리는 것은

 

고요한 빈 터엔 그때의 숨결 일렁이고

목덜미에 훈훈하게 그대 향기 다가온다

돌계단에 여전히 푸르른 그대 앉아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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