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노을
마음이여
누구에게
은장도보다 차고 매서운
칼로
중심을 베였기에
슬픔이
저리도 찬란한가
신경림, 새벽달
돌 깨는 소리 맞은 지 오래인
채석장 뒤 산동네 예배당엔
너무 높아서 하느님도 오지않는 걸까
아이들과 함께 끌려간 전도사는
성탄절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블록 담벼락에 그려진
십자가만 찬바람에 선명하다
눈도 오지 않는 성탄절 날 새벽
복 받은 자들만의 찬송가 소리는
큰 동네에서 큰 교회에서
골목을 타고 뱀처럼 기어 올라와
가난을 어리석음을 비웃고 놀리는데
새벽달은 예배당 안을 들여다보는구나
갈 곳 없어 시멘트 바닥엔
서로 안고 누운 가난한 연인들을 깨우면서
저 찬송가 소리 산동네 덮기 전에
일어나라고 일어나라고
가만가만히 흔들어 깨우면서
권순자, 공중전화
당신의 사랑은 이제 식었는가
큰 길가 꼬집어 뜯는 소음 속에
눈자위는 팅팅 부어
붓는 동안 서서히 잊혀져
관짝 같은 유리박스 안 덩그러니
나 진열되어 있네
이재무, 출구가 없다
사람아, 사람아
통발에 든 물고기같이
평생을 수인으로 살다가
죽어서야 자유로운 사람아
늦가을 빈 밭
홀로 남은 수수깡처럼
깡말라 수척해진 영혼아
사람 안에 갇혀
출구를 잃어버린 사람아
탕진의 세월 속
황홀한 고통을 앓는 사람아
복효근, 거울
고요한 수면 위로
수련 한 송이 핀다
가만히 보니
수면 아래로도 한 송이 뻗어
서로가 서로에게서 피어나고 있다
혹은
꽃 피는 스스로의 노고를
네 덕으로 돌려
꽃 꺾어 바치는 듯하다
허(虛)와 실(實)이 그렇듯
서로에게 거울이었구나
소금쟁이 몇 마리
수면을 팽팽히 붙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