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7knARRRtSWs
박이화,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꽃 지고 나면 그 후는
그늘이 꽃이다
마이크도 없이
핏대 세워 열창했던 봄날도 가고
그 앵콜 없는 봄날 따라
꽃 지고 나면
저 나무의 18번은 이제 그늘이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가
한 시절
목청 터져라 불러 재꼈던 흘러간 노래처럼
꽃 지고 난 후
술 취한 듯 바람 등진 채
비틀거리며 휘청거리며 부르는 저 뜨거운 나무의 절창
그래서 저 그늘
한평생 나무를 떠나지 못하는 거다
시절만큼 꼭 그 젖은 얼룩만큼 나무는 푸르른 거다
설령 사랑도 꽃도
한 점 그늘 없이 피었다 그늘 없이 진다 해도
누군가 들었다 떠난 퀭한 자리마다
핑그르 눈물처럼 차오르는 그늘
꽃 지고 난 그 후는
모든 그늘이 꽃이다
마스카라 시커멓게 번진 검은 눈물꽃이다
이상국, 어느 날 구글 검색을 하다가
이 손바닥만 한 땅덩이에서
아버지는 일생을 소와 함께 살았고
나는 월급봉투로 살았다
지금 나의 자식들은 카드로 산다
카드의 마그네틱 자성은 원래
빅뱅 때 우주에서 날아온 것이고
하늘에는 아직 반짝이는 별이 많다
언젠가 텍사스에서 카드를 긁고
서울에서 결재하며 금전이
하늘을 어떻게 오가는지
오래 바라보았다
사는 게 도깨비놀음이다
그러나 지피에스로 찍고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사실
이 세계라는 것도
별게 아니긴 하지만
어느 날 구글지도 검색을 하다가
바다로 떨어질까 봐
대륙의 가파른 등짝에
한사코 매달린 내 땅을 보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는 게 다 용하다
배옥주, 섶다리에 앉아
늘 거기까지일 것이다
나무 선착장이 수평선을 기다리는 일은
섶다리에 귀를 대고
재갈매기들이 줄지어 엎드려 있다
먼발치에서 구름이 쉬어가고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기다림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기다림이 시작된다는 것을
부은 발등 위로
낚싯배들은 하루의 어로를 묶고
나무섬, 형제섬, 모자섬
가끔씩 섬들이 안부처럼 떠밀려온다
다리에 앉아 몰운대를 바라본다
수평선 너머로 바람이 내걸리고
발끝에 와 닿은 밀물
두어 발자국의 머뭇거림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되돌아서고 만
너를 기다리는 일이 그랬다 섶다리처럼
성영소, 도시의 달
베란다에 나갔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아파트 옥상에 달이 걸려 있었습니다
늙고 병든 얼굴
구부정한 모습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도시에는 왜 왔나
잊고 살아온 달은
도시에는 달이 머물 곳이 없습니다
가로등보다 희미한 달
빌딩의 숲에 가린 달
남산 위에 뜬 달은 의미가 없습니다
오늘 저기 저 달은 그런 줄도 모르는 멍청한 달인가 봅니다
박무웅, 밥 속에 생(生)과 사(死)가 있다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온몸이 날카롭게 진화한다
눈빛이 칼날이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달려간다
한 끼의 밥을 차지하지 못하면 아득한
낭떠러지로 밀린다
양계장의 닭들이 달려든다
모이 앞에 사력을 다한다
후려치는 막대기에 모가지가 두 번 세 번 감겼다 풀려도
다시 달려드는 식욕
한 끼의 밥에 머리를 굽힌다
부끄러운 손을 잡는다
체중을 줄이라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밥의 의미를 다시 적는다
밥이 내 인생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