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영창, 해피
해피가 짖는다
왜 네 이름이 해피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한쪽 귀가 짜부라져 해피인지
다리 하나가 절뚝거려 해피인지
해피인 채로 내게 건너와
너는 나의 해피가 되었다
지금도 네 이름이 해피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가끔은 무섭도록 네가 보고 싶다
우리에겐 깊은 공감이 있었다
세상은 그걸 몰랐다
죽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나이가 지났다
네 순한 눈동자가 닫힐 때
나는 어디 있었던가
나는 안다
나는 그 순간
너와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어둠 속에서
내 눈동자 물기 가득
앞발을 들고
네가 지금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
김경인, 나의 아름다운 정원
태양이 굴러와서
손에 닿는 건 다 불태워버렸지
향나무 그늘 아래 숨겨놓은 흰 조약돌
고백을 재촉하는 물속의 흰 종이도
어린 앵무는 부리만 남기고 개가 다 먹어치웠어
너는 새처럼 얼굴이 없구나
내가 모르는 대가족들이
몰래 꿈속에다 피를 섞는다 꿈이
상한 우유처럼 변해버리라고
라일락 그늘 아래서
나는 잡초를 뽑는다 울면서
손톱이 몽땅 빠져 피가 다 흘러나오기를
열세 살 이후로는 잠옷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벌거벗고 다니다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냐
꿈이 쯧쯧 혀를 찼다
초록을 다 뽑아내야 한다
피가 넘치는 저 나뭇가지가
뿌리를 향해 더 굵어지기 전에
박지영, 그 이름
운명은 번개가 번득이듯 온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문 두드리고 정중하게
들어가도 될까요 하고 묻지 않았다
어느 날처럼
소매 끝을 스쳐지나가 버리지만
그게 운명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그 이름도 그랬다 별 생각 없이 들었는데
내 가슴에 박힐 줄 몰랐다
그 이름에서 벗어나는데 한생이 걸렸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름이
사람들에게는 식당 이름이고 병원 이름이지만
난 종종 그 이름 때문에 당황했다
골목 끝에 운명 같았던 이름의
꽃집이 들어서고
빵 가게가 생기고
정육점이 생기고
난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이름의 정육점에서
사온 고기를 무심히 물어뜯는 날도 오리라
김승기, 해바라기
그녀가 바라보는 하늘은 창문만큼이다
새가 날아가는 것도, 저녁 어스름도 창문만큼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도, 아련한 키스의 추억도
가늘고 길 내일도 모레도 창문만큼이다
바람이 그녀를 흔든다 창문만큼이다
흔들리는 가슴을 안아보려 하지만 창문만큼이다
날이 흐려도 창문만큼, 비가와도 창문만큼
문득 그녀의 등 뒤에 넓은 창 하나 더 달아주고 싶다
이진명, 모래밭에서
내가 많이 망가졌다는 것을
갑자기 알아차리게 된 이즈음
외롭고 슬프고 어두웠다
나는 헌것이 되었구나
찢어지고 더러워졌구나
부끄러움과 초라함의 나날
모래밭에 나와 앉아 모래장난을 했다
손가락으로 모래를 뿌리며 흘러내리게 했다
쓰라림 수그러들지 않았다
모래는 흘러내리고 흘러내리고
모래 흘리던 손 저절로 가슴에 얹어지고
머리는 모랫바닥에 푹 박히고
비는 것처럼
비는 것처럼
헌것의 구부린 잔등이 되어 기다리었다
모래알들이 말했다
지푸라기가 말했다
모든 망가지는 것들은 처음엔 다 새것이었다
영광이 있었다
영광, 영광
새것인 나 아니었더라면
누가 망가지는 일을 맡아 해낼 것인가
망가지는 것이란 언제고 변하고 있는 새것이라는 말
영광, 영광
나는 모래알을 먹었다
나는 지푸라기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