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철, 실없이 가을을
밥집 마당까지 내려온 가을을
갑자기 맞닥드리고
빌딩으로 돌아와서
일하다가
먼 친구에게 큰 숨 한 번
내쉬듯 전화한다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니
좋다고
불현듯 생각한다
가을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와 있어서
그를 그렇게라도 보내게 한다
사윤수, 황룡사지
당신 계신 곳으로
오래 걸어온 동쪽입니다
낮과 밤의 몸뚱이가 베어지고 불타고
세월의 지문과 시간의 잔해만 남은 신전
하얀 나비 떼 니일니일 햇빛 속으로 날아오릅니다
아득히 자줏빛 구름이 옷소매를 드리워
내 눈을 가립니다
아무것도 맹세할 수 없는 풍정
노래와 노래가 뼈와 뼛속으로 스며드는 늪입니다
당신의 손을 잡는 순간
내가 산산히 부서질 예감입니다
어찌 하시렵니까
다시 천년을
김수복, 겨울 메아리
죽고
다시 사는 일이란
아침에서 저녁으로 건너가는
이 나무에게서 저 나무에게로 건너가는
나의 슬픔에서 너의 슬픔으로 건너가는
너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죽음에서 이승으로 건너오는 일인 걸
새벽 눈발을 맞으며
새벽 산허리에 감기는
훨훨, 죽음을 넘나드는 눈발이 되어
한 며칠 눈사람이 되어 깊이 잠드는 일인 걸
최영미, 사계절의 꿈
어떤 꿈은 나이를 먹지 않고
봄이 오는 창가에 엉겨붙는다
땅 위에서든 바다에서든
그의 옆에서 달리고픈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떤 꿈은 멍청해서
봄이 가고 여름이 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
어떤 꿈은 은밀해서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는데
나른한 공기에 들떠 뛰쳐나온다
살 - 아 - 있 - 다 - 고
어떤 꿈은 달콤해서
여름날의 아이스크림처럼
입에 대자마자 사르르 녹았지
어떤 꿈은 우리보다 빨리 늙어서
가을바람이 불기도 전에
무엇을 포기했는지 나는 잊었다
어떤 꿈은 나약해서
담배연기처럼 타올랐다 금방 꺼졌지
겨울나무에 제 이름을 새기지도 못하고
이루지 못할 소원은 붙잡지도 않아
잠들기도 두렵고
깨어나기도 두렵지만
계절이 바뀌면 아직도 가슴이 시려
봄날의 꿈을 가을에 고치지 못할지라도
신현락, 곡절
한 번 굽은 것은 펴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늘 툇마루에서
펴지지 않는 무릎을 감싸안고
열린 문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술냄새를 풍기며
굽은 길을 돌아오시곤 하였다
할아버지보다 몇 해 일찍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딱, 한 번
딱, 하고 무릎을 부러뜨렸다
죽어서야 펴지는 생의 곡절
굽은 길을 영영 돌아오지 못한
할아버지는 직선이 사인(死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