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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외’를 아시나요?
어머니는 정갈하고 단아하셨다. 길에 바지차림으로 나서 본 적이 없으셨다. 바지 자체가 없었을 뿐더러 논밭에서 통바지(일명 몸뻬)를 입고 일을 하시다가 새참을 만들러 갈 때에도 통바지 속에 넣어 두었던 치마를 꺼냈다. 마당이나 텃밭에서 일을 하실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평생을 ‘내외’를 실천하고 사신 분이다. 외간 남자들과 어쩌다 말을 섞게 되면 반드시 고개를 돌리셨다. 장날에 읍내를 나가도 여자 상인을 찾아 물건을 샀고, 집에서 나온 소출을 팔 때도 여자 상인에게 넘기고 말지 난전에서 파는 경우는 없었다. 소매를 하면 더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을 모르시지 않았지만 그러자면 ‘내외‘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어서였다. 그러면서도 텔레비전 속으로 빨려들어갈까 걱정될 정도로 드라마를 재밌어 하시는지라, 어느날 박제된 어머니가 텔레비젼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드라마의 소재란 것이 ‘남녀칠세지남철’에, 오만 거시기한 것들이 아닌가. 거기서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라는 사돈끼리도 예사로 만나고, 심지어 싸움까지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관점에서 보면 ‘본 데 없는 것들’의 같잖은 지정머리일 뿐인 드라마를 그렇게나 재밌어 하시는 것이었다. 어쩌면 당신에게 ‘내외’란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남들이야 어떻게 하든 자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되는 신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신이 만든 행동강령때문에 더 외로운 혁명가처럼.
어머니가 ‘내외‘를 실천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내 장인어른이었지 싶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처가집의 분위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릴 때부터 “절때로 남에게(일가친척이 아닌) ‘헹님’이라 카지 마라. ㅇㅇ어른이나 ㅇㅇ씨라꼬 불러라”, “처가에 가서 만만하게 보이지 마라. 처가에는 ‘헹님’이 없다. 정 불러달라고 하면 ‘헛님‘이라 캐라” 등등의 교육을 줄기차게 받았으나, 웬걸, 개신교의 은총을 3대로 내리받은 처가집에서 내 배움을 실천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처남을 ‘처남‘이라 부르지 못하고, 동서를 ‘동서’라 부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처음 얼마간은 나름대로 사람 간의 정확한 호칭을 처가집에 전도(?)하려고 내 깐에는 용을 썼으나 도무지 전통을 모르는 사람들과 혼자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손윗동서부터 처남을 보고 넙죽넙죽 ‘헹님’으로 부르는 데야 낸들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처남을 ‘헹님’이라 부르면서 동서를 ‘동서’라고 부르기도 거시기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기분으로 처가에서 ‘헹님’을 상용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처가 촌수 개촌수’가 돼 버린 것이었다. ‘헹님’의 부인이면 ‘헹수’가 맞지 어떻게 ‘처남댁’이고, ‘처형’인가? 잠시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이 간단명료한 촌수의 이치를 가르쳐주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들을 사람들 같지도 않았고. 그 대신 손아랫동서가 생기자 나는 “내한테는 꼭 ‘동서’라고 부르게!” 하고 내 양반스러움(ㅎ)을 과시하고자 했던 것인데. 그런데 이 어리버리한 작자가 처음 몇 번은 나를 ‘동서!’ ‘동서요!” 부르더니 오래지 않아 처가집의 ‘개촌수’ 분위기에 휩쓸려 꼬박꼬박 ‘헹님’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나는 포기하고 말았다. 속으로 ‘그래, 평생 그래 살아라, 임마!’ 하면서.
이런 거시기한 분위기의 정점엔 장인어른이 있었다. 장인어른은 ‘내외’란 개념조차 없는 분이었다. 때문에 나는 늘 조마조마했다. 아무리 대를 이은 개신교인이라지만 어머니와 나이도 비슷한데 어떻게 ‘내외’를 모른단 말인가. 안사돈에게 뭐하러 안부전화를 하는가 말이다. 바깥사돈이 받으면 안사돈에게 할말이 있었어도
“고마 끊으시소.”
하고 전화를 끊으시는 어머니신데 그런 분을 붙들고 어떻게 하든지 통화를 이어가려는 장인어른이 영 못마땅했다. 속마음을 쉽게 내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어머니가 내 처가를 ‘본 데 없는 집안’으로 생각하시지나 않을지 염려스러웠다. 그리고 죄송했다. 얼마나 곤혹스러우셨겠는가.
그 ‘내외’ 때문에 지금 생각해도 죄송한 일이 또 있다. 다른 볼일로 나오셨다가 우리집에 오셔서 주무셨는지라 차로 모셔다 드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대로에서 동리로 꺾어지는 도로 입구에서 아랫마을에 사는 친구의 부친(이 분은 아버지의 술친구이기도 했다)을 만나고 말았다.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중임을 깜빡 잊고 차를 세웠다. 그 어른은 읍내 출입을 했던 것인지 많이 취해 있었다. 우리 동네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친구의 동네는 더 멀었다. 내가 차에서 내려 어쩌기도 전에 그 어른은 낼름 뒷자리에 타버렸다. 조수석에 태울 작정이었는데 말이다. 황당하게도 어머니는 그 어른과 합석을 하게 된 것이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어른도 원래 법도를 모르는 분이 아닌데 술기운 때문인지 어머니를 향해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횡설수설을 계속했다. 룸 미러에 비치는 어머니는 고개를 돌린채 당황과 곤혹을 어찌할 줄 모르셨다. 어쩌면 어머니 일생 최대의 곤욕이 아니었을까 싶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 등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어머니를 집에 내려드리고 그 어른도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 대단한 호의는 아니었지만, 베풀고도 화가 났던 적은 처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어른을 자빠지도록 떠밀어 버리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럴수는 없어서 방까지 모시고 가서 눕히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니는 내가 가지고 갈 쌀이며 풋것들을 챙겨 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가주고 가거라.”
어머니에게서 찬바람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화가 많이 나신 것이었다. ‘니는 그 나이를 묵도록 에미를 그렇게도 모르느냐?’ 하는 질책과 원망이 느껴졌다. 너무 죄송했지만 여느 때처럼 모르는 척하고 집을 나섰다. 이후로 나는 오래도록 어머니에게 죄를 지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지내야 했는데……
...... 이런 어머니에게서 나 같이 거시기한 넘이 나온 것은 우주적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