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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소, 낮달
나는 거기 있었네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거기 있었네 네가 떠나간 후에도
나는 거기 있었네 거기가 거기인 줄도 모르고
물이 흐르면서 마르는 동안 바퀴가 구르면서 닳는 동안
지구가 돌면서 밤낮을 바꾸는 동안
그동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는 동안
나는 거기 있었네 네 머리 위에
나는 거기 있었네 비가 내리는 구름 위에
나는 거기 있었네 거기라는 말보다도 한참 먼 거기에
신달자, 내성적인 사랑
너를 구름이라 부른다
저렇게 회색언어로 뭉친 답답한 표정
홀로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면
너는 때로 검은 안경을 쓰고 나를 스치다가
한바탕 알아듣지 못할 몸짓으로 다가서는 것 같기도 하지만
뚝 뚝 두어 방울 말을 떨어트리다가
줄 줄 줄 쏟아붓기도 하지만
비다!
내가 밖으로 나가 온몸으로 질펀하게 고이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젖어보기도 하지만
너의 말 축축하게 배어들기도 하는데
적막!
비 딱 그치고 도저히 너의 말을 나는 찾지 못하는데
젖은 얼굴을 닦는데
오늘의 적막은
하얀 손수건 한 장으로 내 손에 남는다
김주대, 꿈
달의 지평선에
지구가 뜨면
어느 날
나는 거기 있을 것이다
사윤수, 폭설
높은 궁지에서 분분히 하강하는 피난
눈이 내린다
오랜 나날 동안 그 앞을 지나다녔으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떤 골목의 입구
시든 꽃나무 흙덩이를 안은 채 깨어진 화분들과
창백하게 뒹구는 연탄재 위에도 눈이 쌓인다
여기는 어디선가 본 멸망의 나라
사람들 모두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가고
건너편 횟집 수족관 속의 물고기들만
화석처럼 뻐끔뻐끔 이곳을 바라본다
두껍게 얼어붙는 시간의 계곡이
전 생애의 날개를 저어 떠나버린 것들의 뒷모습을 닮았다
하얀 침묵이 소리 없이
지상의 발목까지 내려 쌓이는 동안
그 골목으로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폭설이 서서히 골목의 입구를 닫고 있었다
조은, 어느 새벽 처음으로
이른 새벽 잠에서 깼다
불안하게 눈을 뜨던
여느 때와 달랐다
내 마음이 어둠 속에
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머리맡엔 종이와 펜
지난밤 먹으려다 잊은 맑은 미역국
어둠을 더듬느라
지문 남긴 안경과
다시는 안 입을 것처럼
개켜 놓은 옷
방전된 전화기
내 방으로
밀려온 그림자
창 밖 그림자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밤새 눌려 있던
머리카락이 부풀고
까슬까슬하던 혀가 촉촉했다
흰 종이에다
떨며 썼다
어느 새벽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