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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네가 있어 시를 쓴다
게시물ID : lovestory_887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2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1/14 06:55:4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j03KVYkGgaM






1.jpg

정와연네팔상회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2.jpg

권행은목련꽃 지다

 

 

 

저 집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3.jpg

문태준수족관으로부터

 

 

 

나의 골목 귀퉁이에 수족관이 있어서

물 위에 물을 쌓는

물로 물을 씻는 수족관이 있어서

나는 매번 그곳서 큰 숨을 한차례 쉰다

오늘은 서너마리가 유영을 하고 있다

물속에 가라앉는 물고기가 하늘을 알까만

한 마리에게는 소천(召天)이 있을 것 같다

비늘이 너덜너덜하지만 홑청을 마련해줄 수 없고

겨우겨우 아가미가 움직이나 폐를 빌려줄 수 없다

두 눈이 헐겁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수족관으로부터

너절하고 수군거리고 베개에 머리를 괴러 가는

쓰러져 누운 나의 골목이 하나 있다







4.jpg

한명희새가 된 아내

 

 

 

유언은 너무나 짧았네

남편의 말을 자꾸 들어주다간 너도 나처럼 새가 될 거다

깃털을 몇 개 남기고 엄마는 멀리 날아가 버렸네

 

여보 밥

여보 물

여보 리모콘

여보 전화기

여보 커피

여보여보여보

 

돋아나는 깃털은 아름다웠네

아름다운 깃털이 몸을 덮었네

이러다간 새가 되어버리겠어요

아내의 하소연은 간곡했네

 

여보 밥

여보 물

여보 리모콘

여보 전화기

여보 커피

여보여보여보

 

깃털을 몇 개 떨군 채 새는 인도네시아에서 서울까지 날아왔네

남편의 말을 자꾸 들어주다간 당신도 나처럼 될 거예요

새는 말하네 싱크대 선반에 앉아 말하고 또 말하네

 

여보 밥 여보 물 여보 리모콘 여보 전화기 여보 커피

여보 여보 여보 여보 소리 귓가에 쟁쟁하네







5.jpg

최문자

 

 

 

저 멀리

내 청춘 벌써 지나갔네

말 없는 마른 풀들과 함께

뒷뚱 기우뚱 뒤돌아보며 지나가다가

유목민으로 오래 서성거리다가

혹 잊혀졌는가 싶을 때

너무 늦게 서로에게 가고있네

지금도

네가 있어 시를 쓴다

네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써댔던 그 무수한 시들도

실은 내게로 향한 것들이었다

먼 데 갔다가도

언제나 내게로 돌아서던 여러 겹의 막막함이었다

사랑은 쓸쓸해서 너무나 머나먼 길

그 길을 걷다가 눈물겨워도

아프다 아프다 하지 못했다

오늘은

몹시 앓을 것 같은 이 예감으로

너와 내 가슴에 불을 지피고

초원으로 가서 길을 잃고싶다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사랑은 온다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고통인가

사랑은 얼마나 열렬한 고독인가

찌르고 기다리고 다시 찔리는

신열의 잎사귀들

쉽게 부서지는 걸 사랑이라 부를 수 없어

이제

사람들 다 돌아간 자리

바람에 책갈피 마구 날리며

길인 줄 알고 은행잎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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