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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j03KVYkGgaM
정와연, 네팔상회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권행은, 목련꽃 지다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툭,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문태준, 수족관으로부터
나의 골목 귀퉁이에 수족관이 있어서
물 위에 물을 쌓는
물로 물을 씻는 수족관이 있어서
나는 매번 그곳서 큰 숨을 한차례 쉰다
오늘은 서너마리가 유영을 하고 있다
물속에 가라앉는 물고기가 하늘을 알까만
한 마리에게는 소천(召天)이 있을 것 같다
비늘이 너덜너덜하지만 홑청을 마련해줄 수 없고
겨우겨우 아가미가 움직이나 폐를 빌려줄 수 없다
두 눈이 헐겁게 떨어져나가고 있다
수족관으로부터
너절하고 수군거리고 베개에 머리를 괴러 가는
쓰러져 누운 나의 골목이 하나 있다
한명희, 새가 된 아내
유언은 너무나 짧았네
남편의 말을 자꾸 들어주다간 너도 나처럼 새가 될 거다
깃털을 몇 개 남기고 엄마는 멀리 날아가 버렸네
여보 밥
여보 물
여보 리모콘
여보 전화기
여보 커피
여보, 여보, 여보
돋아나는 깃털은 아름다웠네
아름다운 깃털이 몸을 덮었네
이러다간 새가 되어버리겠어요
아내의 하소연은 간곡했네
여보 밥
여보 물
여보 리모콘
여보 전화기
여보 커피
여보, 여보, 여보
깃털을 몇 개 떨군 채 새는 인도네시아에서 서울까지 날아왔네
남편의 말을 자꾸 들어주다간 당신도 나처럼 될 거예요
새는 말하네 싱크대 선반에 앉아 말하고 또 말하네
여보 밥 여보 물 여보 리모콘 여보 전화기 여보 커피
여보 여보 여보 여보 소리 귓가에 쟁쟁하네
최문자, 길
저 멀리
내 청춘 벌써 지나갔네
말 없는 마른 풀들과 함께
뒷뚱 기우뚱 뒤돌아보며 지나가다가
유목민으로 오래 서성거리다가
혹 잊혀졌는가 싶을 때
너무 늦게 서로에게 가고있네
지금도
네가 있어 시를 쓴다
네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써댔던 그 무수한 시들도
실은 내게로 향한 것들이었다
먼 데 갔다가도
언제나 내게로 돌아서던 여러 겹의 막막함이었다
사랑은 쓸쓸해서 너무나 머나먼 길
그 길을 걷다가 눈물겨워도
아프다 아프다 하지 못했다
오늘은
몹시 앓을 것 같은 이 예감으로
너와 내 가슴에 불을 지피고
초원으로 가서 길을 잃고싶다
부르지 않아도 은밀한 사랑은 온다
사랑은 얼마나 비열한 고통인가
사랑은 얼마나 열렬한 고독인가
찌르고 기다리고 다시 찔리는
신열의 잎사귀들
쉽게 부서지는 걸 사랑이라 부를 수 없어
이제
사람들 다 돌아간 자리
바람에 책갈피 마구 날리며
길인 줄 알고 은행잎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