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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처음
두 마리 반딧불이 나란히 날아간다
둘의 사이가 좁혀지지도 않고
말소리가 들리지도 않고
궁둥이에 붙은 초록색과 잇꽃색의 불만 계속 깜박인다
꽃 핀 떨기나무 숲을 지나 호숫가 마을에 이른 뒤에야
알았다
아, 처음 만났구나
이기철, 새 해를 기다리는 노래
아직 아무도 만나보지 못한 새 해가 온다면
나는 아픈 발 절면서라도 그를 만나러 가겠다
신발은 낡고 옷은 남루가 되었지만
그는 그런 것을 허물하지 않을 것이니
내 물 데워 손 씻고 머리 감지 않아도
그는 그런 것을 탓하지 않을 것이니
퐁퐁 솟는 옹달샘같이 맑은 걸음으로
그는 올 것이니
하늘을 처음 날아 보는 새처럼
그는 올 것이니
처음 불어보는 악기소리처럼
그는 올 것이니
처음 써본 시처럼
처음 받아든 연서처럼
그는 올 것이니
화려하지는 않지만
어디에도 때 묻지 않은 새 해가
햇볕 누이의 마중을 받으며
작은 골목 작은 대문을 향해
종종 걸음으로 그는 올 것이니
김형영, 날마다 새롭게
나무들의 대성당에서
아침마다 새들은 노래한다
밤새 내려온 이슬방울은
하늘의 눈망울을 깜박거리고
바람은 마냥 흔들 불어
아침을 연다
그래, 오늘은 또 이렇게
하루를 시작하는 거다
맑은 공기로 가슴 부풀려
세상을 떠도는 거다
어젯밤 꾼 꿈을 찾아보는 거다
콧노래를 부르며
콧노래와 함께
콧노래에 맞춰
나는 다시 나를 찾아
내 노래를 부르는 거다
대성당의 나무들처럼
거기 깃들어 사는 새들처럼
나도 거기 깃들어
날마다 한결같이
날마다 새롭게 나를 사는 거다
김미정, 투명한 대화
어항의 입구가 벌어진다
그 넓이만큼 퍼진 귀의 식욕이 수면을 바라본다
물고기가 투명한 소리를 뱉는다 ; 삼킨다
언젠가 말하지 못한 고백처럼
우린 어항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어항이 꿈틀거린다
투명한 울림, 소리의 본적이다
입술을 떠나 어디론가 사라지는
힘껏 던져도 깨지지 않는 혀를
너는 내민다 ; 넣는다
입 모양만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당신의 말들이
쌓이고 쌓여 어항을 채운다
사다리가 늘어나고 큰 자루가 필요하다
소리가 움직인다 아래 ; 위
잎사귀들이 함께 넘친다
이제 귀는 떠난 소리를 그물로 떠올리고 있다
물고기들이 강을 따라 흘러간다
어항의 침묵이 시끄럽게 들리는 오후
누군가 유리컵을 두드리고
헐거워진 귀가 바닥에 떨어진다
김정경, 검은 줄
파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주머니엔 말린 꽃잎 같은 지폐 몇 장
만지작거릴수록 얇아졌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니
방바닥에 검은 줄 하나 그어져 있다
특수고용자로 분류된 나는
노동조합이 철야 농성 중인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출입문 위에
붉은 글씨로 쓴 부적들 나부끼고
제 이름 외치며 뛰쳐나온 노란 팬지꽃
화단 위에 삐뚤삐뚤 구호를 받아 적었다
나무 기둥의 몸을 열고 나온 날개미들
좁은 방에 검은 줄 늘려가고 있다
문 걸어 잠그고
쓰다 남은 살충제 쏟아 붓는다
혼자서 살겠다고
혼자만 살아보겠다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던 자기소개서
개미들이 따라가며 밑줄을 긋는다
고쳐 쓰다만 자기소개서 위의 검은 줄이 흩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