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장 불타는 도산성
1598년 10월 28일 낮 도산성
‘결국, 이렇게 되는군….’
녹색 갑옷을 갖추어 입고 큰 고깔모자 같은 투구를 쓴 왜장이 흰 부채를 쥐고선 말 위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가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높게 쌓인 3단 왜성이 불길에 휩싸여 큰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주군. 불길과 너무 가깝습니다. 조금 물러나시는 게….”
부관으로 보이는 자가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뒤로 나올 것을 청했다.
“괜찮다. 가토 키요베에. 불타는 성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도산성을 쌓고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을 생각나서 기분이 묘하구나. 나만 이런 것인가? ”
엷은 미소를 띤 채 가토 기요마사가 부장에게 한마디 하고선 다시 말없이 불타는 성을 쳐다보고 있었다
1598년 9월 22일. 울산에서 다시 한 번 조·명연합군과 가토 기요마사 군과의 접전이 있었다. 제독 마귀와 별장 김응서 등이 이끄는 4만의 연합군은 울산 왜성의 가토 군과 맞서 싸웠으나, 저번 전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은 왜군의 철저한 준비로 인해 성과 없이 물러났다.
이후 같은 해 8월 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의 후시미 성에서 급사하자 각 왜성에 있던 왜장들은 이때를 틈타서 철군을 서둘렀다. 울산에 웅거한 가토 기요마사도 마찬가지여서 10월 27일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부산성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서를 받고는 도산성과 서생포 왜성을 훼손하고 부산포로 회군하기에 이른다.
동년 11월 24일에 가토 기요마사는 부산에서 왜국으로 귀국길에 오른다. 정유년 4월에 다시 조선으로 건너 온 지 1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살았어. 살았다구…. 겐도운상 살아서 집에 간다고요.”
젊은 청년이 불타는 왜성을 바라보며 노년의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래. 신지. 결국, 돌아가는구나. 그때 물장수가 없었더라면…. 내 살아생전에 다시 손녀딸도 못 봤을 거다.”
신지와 겐도운이 그동안의 소회를 나누고 있는 동안 그들 옆에는 오랏줄로 꽁꽁 묶인 자들이 한 줄을 서 있었다. 가토가 잡아드린 조선인 포로들이었다.
울산성 전투가 끝나고 왜국으로 돌아간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의 거점인 구마모토에 큰 성을 쌓았다. 이때 성의 건축과정에서 그의 군이 강제로 납치한 조선인 포로도 상당수가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구마모토에는 우루산마치(울산정)역 이라는 지명이 있을 정도다.
가토는 도산성의 전훈으로 식수확보에 대한 남다른 집착을 보였다. 그 결과 구마모토 성에는 120개가 넘는 우물을 만들었다. 이중 다수는 메이지 시대에 매립되었지만, 아직도 본환에는 7개의 석정이 남아있다. 식량 대책 또한 철저히 준비하여 장기보존이 가능한 해조류를 창고에 보관하고 천수각의 3천여 개의 모든 다다미를 흰 토란 줄기와 고구마 줄기로 만들어 비상시를 대비했다고 한다.
가토는 도산성에서의 고난을 반면교사 삼아서 구마모토성을 난공불락의 요새화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후대에 이르러 메이지 유신 이후 새로 들어선 정부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들 중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반정군이 구마모토성에 주둔한 신 정부군을 에워싸고 화포를 동원하여 성의 주요시설들을 모조리 포격하였는데도 함락에 실패할 정도였다.
에도시대에 이르러 가토 기요마사는 여러 매체에서 영웅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조선에서의 호랑이 사냥과 도산성 전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1797년에 출간된 「에혼 다이코기」라는 소설에는 ‘기요마사는 인정이 깊어 조선 백성을 함부로 죽이지 않아 조선 백성들이 도깨비 장군(가토 기요마사를 지칭) 휘하에서 백성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는 황당한 내용이 적혀있기도 하다.
이 밖에도 한창 농성 중인 울산 왜성에 조선에서 보기 힘든 가마우지떼가 날아들었는데 이는 왜국의 신이 기요마사를 도와 왜군을 승리를 알리는 신의 의지라고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기요마사 고려진 비망록)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가토 기요마사를 신으로 모시면 병이 낫는다는 신격화에 이르기도 한다. (묘견보살 감응 기요마사 진전기 등)
한편, 불타버린 울산성은 조선 수군에 의해 선착장으로 활용되었다. 왜군이 만든 선입지와 왜성의 성곽 더미를 이용하여 왜성을 수군 기지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1654년 기지가 개운포로 옮겨질 때까지 30년 동안 도산성은 수군의 선착장 역할을 맡게 된다.
“전군. 부산성으로 행군한다.”
가토의 명에 그의 군졸들과 노역자들 그리고 조선인 포로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 중 시뻘겋게 달아오른 울산성에 눈길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필로그
1600년 봄 울산의 어느 포구마을
나지막한 언덕 위에 초가의 모습이 보였다. 새로 지은 듯 깔끔하고 견고해 보이는 훌륭한 집이었다. 싸리로 엮은 낮은 담장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새로운 계절의 전령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빗질이 된 흙 마당에는 나무로 만든 평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젊은 아낙네가 어린아이의 젖을 물리고 있었다. 마치 민속화의 한 장면을 고대로 그린듯한 평온한 시골풍경이었다.
“점순이네. 새댁. 안에 있는교?”
중년이 여인네가 사립문 앞에서 안주인을 불렀다. 젖을 주던 여인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이웃은 촐싹맞은 걸음걸이로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 밥 멕이고 있구마.”
“어서 오이소. 김천댁. 무슨 일인교?”
아낙은 막 평상 위에 아무렇게나 퍼지고 앉은 이웃사촌에게 살갑게 말을 건넸다. 어린아이는 누가 왔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여전히 꼬물거리며 그녀의 가슴을 탐하고 있었다.
“아이고마. 새댁 바깥양반이 고래 잡아오고 있다고 안 카는 교. 참. 놀랜 노짜데이. 허풍선이줄 알았는데 그리 큰 고래를 잡아올지 누가 알았겠노. 포구 뱃사람들 말로는 귀신고래라 카데에.”
“아지메요. 우리 서방이 한다면 하는 사나이 아닌교. 내는 아까 저 멀리에서 배 들어 오는 거 다 보고 있었슴더.”
중년의 아지메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맞나? 내가 제일 먼저 알고 이리 달리온 건데. 어찌 봤노? 동란 전에 뭘 했길래 그리 눈이 밝은교?”
일순 표정이 어두워지는 안주인이었다. 그때였다.
“으앙 으앙”
어미로부터 관심을 빼긴 아가가 기운차게 울기 시작했다. 지켜보던 옆집 여인이 아기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르르 까꿍. 아 가 어무이 닮마가꼬 참 곱네. 그 눈 밑에 점만 없으면 참 좋을낀데...”
“와예? 우리 바깥양반은 그게 진짜 매력이라 하던데예?”
“진짜로?”
어미의 반박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동리 아낙이었다. 그녀 입에서 또 어떤 소리가 나올지 몰라서 안주인은 선수를 쳤다.
“배 들어 오니 포구로 가시야지에? 동네 사람들 다 갔겠구마.”
“아 참 내 정신 좀 보소. 그럼 얼라 갈무리 잘 해갔고 내려오소. 나 먼저 가께.”
들어올 때처럼 촐싹거리며 나가는 동리 아지메였다. 여인은 어느새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맘마 다 먹었으니 내려가자꾸나. 아가야. 네 아부지가 큰 고기 잡아왔단다. 고기”
“딸랑딸랑”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처마 밑 파란 유리풍경을 간질거렸다. 어미는 풍경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마를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終-
드디어 완결 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역게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혹 시간이 되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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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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