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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대화
겨드랑이 밑으로 숨어드는 얼굴을 자꾸 끌어다 놓고서
나는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옥수수알들이 옥수수를 향해 결의하듯이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하품하듯이
옷을 입고 옷을 입고 옷을 입고
당신은 앞니 두 개가 튀어나왔다
당신은 곱슬머리를 갖고 있다
당신의 눈은 졸음을 향해 간다
나는 대답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늘 언제나 매일
머리를 빗고 머리를 빗고 머리를 빗고
나는 내 앞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 옆의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으로 체중이 늘고 체중이 늘고 체중이 늘고
우리는 발을 씻듯 허무를 견디고
계단을 오르듯 죽음을 비웃고
닭다리를 뜯다가 시계를 보고
서둘러 집으로 간다
김미정, 하드와 아이스크림
그는 내 손을 잡지 않고
손가락 하나만 잡는다
늘 그런 식이다
작은 것에 몰두하는 날들이다
냉동실에 넣어 둔 하드가 물컹거린다
하드는 딱딱한 것이 본질인데
언제나 현상은 본질을 앞지르곤 한다
마음의 길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그의 손바닥을 생각한다
내 손가락이 그의 손 안에 있을 때
태양은 나를 낯선 곳으로 데려가려 한다
그래도 안심을 한다
그가 잡았던 손가락을 만지며
뜨거운 모래밭으로 걸어간다
바람은 본질과 현상은 하나라고 말한다
그래도 하드는
아이스크림이 아니지 않는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작은 것에 집착하는 날
흩어지는 모래알이 전부인
이홍섭, 화이트 크리스마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눈이
사철나무 가지를
뚝 뚝 부러뜨리고 있다
눈은 내리는데
눈은 쌓여만 가는데
지금 저 먼데서
내가 아는 한 사람이 몹시 아프고
그 사람은 지금
내가 설원을 건너
푸른 심줄이 돋아나는 그의 이마를 짚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하지만 나는 지금
창 너머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그냥 바라만 보고 섰는 것이다
눈은 나리는데
눈은 쌓여만 가는데
어디선가 사철나무 가지는
뚝 뚝 부러지고
김소연, 그래서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이태수, 문이 나에게
내가 기댈 데라고는 벽밖에 없습니다
나는 밖과 안 사이, 벽에 바짝 붙어삽니다
사람들의 벽은 나의 집, 내 삶의 터전입니다
사람들은 내가 살 집을 만들어 준 뒤
나를 밀고 당기며 안과 밖을 드나듭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나는 열리고 닫힙니다
사람들은 내가 열려야 들어오고 나가면서도
그런 나를 혹사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닫고 열고 닫아 버립니다
안으로 굳게 빗장을 지르기도 합니다
나는 안과 밖을 내다보고 들여다봅니다
나를 꽉 붙잡고 서 있는 벽들도
내 눈치 보며 안팎을 살피곤 합니다
어떤 사람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바깥세상에도, 안쪽 세계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나는 비록 벽에 붙어 살아가지만
사람들은 벽 때문에 살고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계의 안팎을 쥐락펴락하는 나는
사람들의 운명까지도 놓았다 쥐었다 합니다
나는 사람들에겐 늘 '좁은 문'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