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희, 누란
제 몸 허옇게 드러내는 곳 있네
떠도는 자의 헤진 옷자락 같은 물줄기
그곳은 타클라마칸의 젖줄이라네
퉁퉁 분 젖줄을 거슬러 은고기 찾던 사내들
솟대로 솟은 소하묘 나무, 그 속을
바람은 거룻배처럼 드나들었네
소금 기둥에 매여 있던 누란 미녀
배 형상 관 속에 누워 사천 년을 건너왔네
바람의 뼈 같은 희미한 목소리
초원 가득 돋아있네
모래바람으로 떠돌던 사내들이 머물다 간 로프노르
한번은 여자를 살고
또 한 번은 남자를 살기 위해
돌아와야 하는 땅
오아시스가 있었다던 그곳
목마름은 수천 년 물을 마셔도 달랠 수 없는 걸까
이정표 없이 걸어온 맨발이 목젖을 드러내는 누란
길 잃는 것은 죽음과 같아서
사랑은 모래바람으로 돌아와 쌓이는데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땅
머리에 꽂힌 해오라기 깃털 멀리 던지고
나, 헛구역질하듯 소금호수에 들어서네
이재무, 경쾌한 유랑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참새 무리를 만나다
저들은 떼 지어 다니면서 대오 짓지 않고
따로 놀며 생업에 분주하다
스타카토 놀이 속에 노동이 있다
저, 경쾌한 유랑의 족속들은
농업 부족의 일원으로 살았던
텃새 시절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가는 발목 튀는 공처럼 맨땅 뛰어다니며
금세 휘발되는 음표 통통통 마구 찍어대는
저 가볍고 날렵한 동작들은
잠 다 빠져나가지 못한 부은 몸을
순간 들것이 되어 가볍게 들어 올린다
수다의 꽃피우며 검은 부리로 쉴 새 없이
일용할 양식 쪼아대는
근면한 황족의 회백과 다갈색 빛깔 속에는
푸른 피가 유전하고 있을 것이다
새벽 공원 산책길에서 만난
발랄 상쾌한 살림 어질고 환하고 눈부시다
김진기, 어르신은 힘이 세다
세탁물 속에서 이천 원이 나왔다
윗도리 주머니에 넣어두고 잊었던 지폐 두 장
구겨졌지만 멀쩡하다
세탁기를 돌리고 나면 가끔 주머니에서
뭉친 휴지나 지폐가 나온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젖은 종이는
메모지나 영수증으로 추측 될 뿐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지폐는 힘이 세다
흔들고 쥐어짜고 두드리고
거친 소용돌이를 헤쳐나오고도
또렷한 일련번호, 선연한 은박 수직선
어른의 수염 한 올 다치지 않는다
툭툭 털고 일어서는 저 올곧은 뼈대라니
나보다 힘이 센 어른 앞에 서면
왠지 무릎을 꿇고 싶다
등을 구부리고 돈을 만져본다
서슬이 퍼렇다
어르신 두 장 공손하게 지갑에 모신다
고영민, 민물
민물이라는 말은 어디서 왔을까
약간 미지근한
물살이 세지 않은
입이 둥근 물고기가 모여사는
어탕집 평상 위에
할머니 넷이 나앉아 소리 나게 웃는다
어디서 오는 걸까, 저 민물의 웃음은
꼬박 육칠십 년
합치면 이백년을 족히 넘게
이 강 여울에 살았을 법한
강 건너 호두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인다
긴 지느러미의
물풀처럼
어탕이 끓는 동안
깜박 잠이 든 세 살 딸애가
자면서 웃는다
오후의 볕이 기우는 사이
어디를 갔다 오느냐
이제 막 민물의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아가미의 아이야
최정란, 모두 네 덕분
내 그림자 참 완전하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길어졌다 짧아졌다, 옅어졌다 짙어졌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꽃피고 햇빛 좋은 날
좀 앞장서라 하여도
제가 나설 자리 아니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니
겸손하기까지 하다
한 마디 안 하는데도
일억 오천만 년 전 제 별을 출발한 빛이
참 대접 잘 받은 것 같다 칭찬한다
그림자 덕분에 나도
이만큼 사람 구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