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
톡.
툭.
투둑.
툭.
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이내 폭우가 쏟아졌다.
길이 매끈하지 못한 탓에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우현의 차가 물웅덩이를 지나며 촤아악 하며 물보라를 만들었다.
우현은 묘한 설렘에 달뜬 얼굴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속도를 높이지 않은 편인데도,
오늘만은 조금 더 빨리 집에 도착해야 했다.
왜냐면 오늘은 '그녀'가 집에 없는 날이니까.
그리고 오늘은 '그 애'가 단 둘이 있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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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요즘들어서 최대한 일찍 퇴근하려고 노력했다.
잠깐이라도 그 애의 얼굴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집에서 일했다.
그 애는 그녀의 학생이었다.
몇 년전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온 그녀는 무대에 연주자로 설 수는 없었고,
음대 입학을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레슨을 하며 소일하고 있었다.
가끔 일찍 퇴근하던 날이면, 그 애를 보게 되었다.
아내의 연주실 문틈 새로 그 애를 가끔 보곤 했다.
그 애가 바이올린을 켜면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안된다. 그 애의 목덜미를 생각하면 안된다.
그 애가 바이올린을 켜면 가느다란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안된다. 그 애의 손가락을 생각하면 안된다.
그 애가 바이올린을 켜면 숨을 머금고 도톰한 입술을 내밀곤 한다.
안된다. 그 애의 입술을 생각하면 안된다.
사고 이후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은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이미 그녀와의 사랑은 애저녁에 식은 게 아닌가 싶었다.
거기다 부부생활이라고 해봤자...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뿐, 이미 아내에게 남은 애정은 없다.
가끔씩 밤중에 그녀가 비명을 질러대며 나쁜 꿈을 꿀 때마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서 울부짖을때마다 이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 죄책감의 감옥을, 이 결박을.
어느날 퇴근 후 거실에서 쉬고 있는 '그 애'를 마주쳤다.
연주실 문틈으로 봤을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새하얀 목덜미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쓸고 있었다.
그리고 도톰한 입술로 말했다.
"선생님께서 마그리트를 좋아하시나보죠?"
거실에 걸려 있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고서 한 말인가.
거실에는 내가 연애시절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던 그림이 걸려 있다.
마그리트의 연인, 직접 닿고 싶지만 더 가까이 닿을 수 없도록 흰 복면으로 가려진 두 사람...
당시의 나와 아내처럼, 더 가까워질 수 없어 아쉬운 우리 모습 같아서 선물한 그림이었다.
그 애와 조금은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서재로 돌아와 앉았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왜 숨이 찬 거지.
그 아이도 내게 조금은 관심이 있는 걸까?
그 날 이후 몇 번 더 그 애와 마주쳤다.
처음은 집에 있는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 아내와 습관,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된 계기...
그 애는 수다스럽지는 않았지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런 그 아이를 천천히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즐거웠다.
차분한 말투, 단아한 이마, 조그마한 발과 길다란 다리.
종합예술작품중 사람은 포함되지 않으려나? 이렇게 동적이면서 이렇게 정적인 예술이라니.
한 동안 매일 잠들면서 그 애를 안는 꿈을 꾸곤 했다.
이러면 안되지 하면서도 안되긴 뭐가 안돼? 생각일 뿐인데 하고
마음이 엎치락 뒤치락 했다.
한 달 전 결혼기념일에 그녀와 크게 다투고서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짜증섞인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너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야! 머리 속엔 그런 문장이 떠올랐지만
차마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아무말 없이 집을 나오고 말았다.
그 주에는 정말 특별한 일이 시작됐다.
그 애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게.
집 밖 우편함은 아내가 확인하지 못할 것을 알고 그런건지,
그 애의 레슨 날마다 사랑의 고백이 담긴 편지가 우편함에 들어 있었다,
'Dear 정말 사랑스러운 당신.
나도 당신에게 더 다가갈 수 없어 너무 아쉬워요.
왜 우린 둘일까요? 하나이면 안될까요?
당신 속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요?
얇은 천보다 더 얇은 피부라고 해도 우리를 막고 있잖아요.
우리가 정말로 하나가 되면 좋겠어요.
당신이 없는 나는 생각할 수 없어요.
아니 당신때문에 내 속에 빈 자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 감정은 무엇일까요?
온전히 당신의 것이고 싶고, 당신을 모조리 갖고 싶어요.'
열렬한 사랑의 편지를 보고서 처음엔 당황했다.
아니, 나만의 사랑이 아니었던 건가?
어떻게 이런 행운이, 내게?
나 또한 그녀에 대한 내 사랑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리고 오늘, 오늘이다!
몇 통의 편지를 주고 받은 후, 우리는 아내 몰래 만날 날짜를 잡았다.
오늘은 아내가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는 날.
일을 핑계로 아내의 수발은 그녀의 친구라는 사람에게 맡겨두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내는 하루쯤 친구의 집에서 지내고 올 것이라고 말했다.
내 생각은 하지 말고 천천히 지내다 와도 된다고 말했다.
그 애와 만날 장소는 우리 집이다.
그 애가 레슨을 오듯 우리집에 오면 될 것이고
나는 퇴근하고 최대한 빨리 집으로 오기로 했다.
비를 뚫고 집에 도착했다.
우산을 펼 시간도 아까워 비를 맞고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비의 감촉이 느껴졌다. 한기가 돌았다.
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 차가운 공기.
불을 켜지 않아 어슴푸레하게 집안의 사물들이 보인다.
그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뒤돌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셨어요?"
그 아이 곁으로 가서 눈을 보았다.
그 아이 옆으로 가 무릎 꿇고 앉았다.
아, 나의 천사, 나의 여신!
아이의 눈은 왠지 좀 더 차가운 듯 하다.
"눈 감아주시겠어요. 제가 드릴 선물이 있는데. 두 손을 저에게 주세요."
그 아이의 말대로 했다.
그 아이의 선물은 뭘까.
설마 우리의 첫키스?
부드럽게 시작할까?
어쩌면 뜨거운 키스를 좋아할 지도 몰라.
"입을 벌려 주세요."
정말?
아, 기대된다.
어떻게 이 아이를 가질까.
얼굴 근처에서 아이의 뜨거운 입김이 느껴진다.
하, 따뜻해.
두근두근한 이 마음.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조바심과 이 순간 설레는 마음이 공존한다.
"읍! 읍! 으으읍!"
이게 뭐지? 입 속에 뭔가 들어왔다.
천같기도 하고, 이건 뭐지?
눈을 떴다.
두 손은 결박되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렸다.
"읍! 읍! 읍읍!"
뭐하는 거야? 이게?
아...
이런 플레이를 좋아하는 건가?
준비되지는 않았지만
맞춰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런건 동의하에...
"엇!"
갑자기 새하얀 것이 시야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발목과 무릎을 밧줄같은 것으로 감는 게 느껴졌다.
오, 정말 본격적인데?
이런 건 해본 적이...
그 애가 말을 했다.
뒤쪽으로 휠체어 소리가 들렸다.
"흰 복면으로 가려진 두 연인,
더 가까워질 수 없어서 아쉽다고 했었지?
그것도 영원하지 못하네.
한 쪽은 이제 내가 대신할테니,
당신은 내 연인한테서 멀리 떨어져 줘.
얼만큼 멀리냐면...
저승정도면 될 것 같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