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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차마 그것을 바라지는 못하고
내 통장에 삼백만 원 남아 있다면
어떻게 할까 궁리하다가
그것이 아니라면 통장의 잔고가 일천만 원이면
어떨지 마음 벌렁거리다가
내가 만약 세상을 비워야 한다면 그걸 어떻게 할까 생각한다
노부모가 스치는 김에
그래서 일억 원이면 어떨까 침을 삼킨다
사천이거나 오천이거나
그래봤자 늘 그랬을 기록으로는
덩그마니 집을 샀겠지
그 집이 비고 그래서 남게 되더라도
허공에게 주진 않을 것이라면
그 소유가 당신이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러다 조금
그러다 멍하니
산수도 못하는 입장에서 가늠한다
당신이 그 집에 들어 살면서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 병에 걸리는 것
나 또한 죽어서도 많은 숫자를 불리느라
허둥거려야겠는 것
생각은 그것만으로 참으로 부자다
그것으로 되었다
김충규, 누가 나를 읽을까 봐
나무 아래서 책을 읽는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오지 않는 새
책을 나무 결에 심고, 나무를 베어 책을 만든다
뭉텅, 암투병 모친의 머리칼같이 빠져버린 그늘
뒤늦게 새가 오더라도 쉴 그늘이 없다
심은 책이 자라 풍성해지기까지는
나라는 책을 펼치면 페이지마다 피가 젖어 있어서
누가 나를 읽을까 봐 두려워 환한 데로는 못 간다
새가 와서 피를 좀 씻어주었으면
새의 피는 흰빛이라고
믿기로 한 늦은 오후에
박춘식, 끌고 가는 화살표
화살표 따라서 출근하는 사람들
거리를 누비고
관공서도 드나든다
컴퓨터 마우스에 끌려 다니는 사고
발걸음도 운전도
화살표 없이는 나갈 수가 없다
깊이 몸속에 들어와버린 화살표
빠르게 혈관 속을 질주해야
하루만큼 시간을 세울 수 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삶을 저만치 끌고 앞서 가는 화살표
잠시 화살표가 사라지면
다리가 풀리고
눈이 하얗게 멀어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수직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화살표가 먼저 서둘러 내린다
나보다 먼저 신발 벗고
샤워물 온도를 가늠하고 있다
최정란, 반환점
어떤 바다거북은
삼십오 년 동안 헤엄쳐 가서 다시
삼십오 년 동안 헤엄쳐 돌아와 생을 끝낸다
떠났다가 돌아오는 단 한 번의 왕복
그것이 일생일 수 있다면
가던 방향을 미련 없이 버리고 돌아서야 하는
반환점은
대양의 물결 속 어디쯤일까
두께가 나날이 얇아져가는 지느러미를
추스를 겨를도 없이
어디가 반환점인지, 금지된 수역인지
물빛을 살피지 못하고 파도에 떠밀려 허우적거리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여기가 어디일까
붉은 해일에 숨이 막힌다
한 번 큰 물결을 타면 멀리
아주 멀리 가고 싶어 질까봐 아주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봐
앞을 막아서는 노을을 물리치며
허겁지겁 서둘러 아침에 떠났던 집으로
백 번도 넘게 돌아오는 저녁
유금옥, 나무와 나의 공통점
우두커니 서서 새소리 듣는 일, 종일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일
마른 혓바닥을 조금씩 부숴 새의 먹이로 주는 일
만나기 훨씬 이전인 듯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잊는 일
반달의 모서리에 맞아 머리를 다치는 일
다친 머리에 새집을 짓는 일
치매에 걸려서 내가 누구지? 거울을 보는 일
거울 속으로 들어가서 저울을 들고 나오는 일
그래도 새알이 깨질지 모르니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일
너무 오랫동안 심심하면 햇살을 주물럭거려 꽃송이를 빚는 일
지나가는 봄바람이 기웃거리면
꽃을, 몽땅 거저 줘 버리는 일
꽃피우기 훨씬 이전인 듯
가랑잎이 들어 있는 신발을 신고서서 별을 바라보다가
서서 잠드는 일, 별이 꽁꽁 얼어 눈이 흩날리면
새하얀 종이 한 장 되는 일
새소리만 종이배에 태우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