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모르는 척
차가운 콘크리트 기둥 아래
청소부가 몰래 들어와 빗자루를 안고 쪽잠을 잔다
햇살이 침입자를 감싸주고 있었다
가스총을 찬 경비 아저씨가 달려오다가
멈칫 서더니
슬그머니 되돌아간다
홍해리, 산책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강인한, 입술
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 것은
심장에 깊숙이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최지하, 그리움
노란 비늘을 털어내는
거리 한 복판에서
뒹구는 바람을 줍다가
빈가지 끝에 실려
혼자서 앓고 있는
가을을 보았습니다
보내도 떠나지 못하는
당신처럼 미련하게
김원경, 물의 진화
체온을 가둔 빛의 표정이 물위를 돌아다니고
이것은 세계에 대한 진지한 시술
빈방에 희미하게 들리는
강물소리를 걷는다
여기에 앉아 있으면
이미 도착한 물결이 다른 물결을 잡고 있다
나는 곧
소리에 고인다
소금쟁이가 다리를 떨면서 걸어가는 소리
네가 아이였을 때 냈던 웃음소리
물수제비가 건너며 내는 파문의 소리
사라진 물고기의 숨소리
한 마리 새가 물마시던 강 옆에서
물의 억양은 창백하다
그것은 주름진 피부였고
하나였다가 여럿이었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녹초들은 미끄러지고
금빛 모래는 입을 막고 울고 있다
다만 너에게 이것은 추측이라는 사실
주파수를 돌려보내는 물의 신음소리
창백한 안료들이 내 얼굴에 고인다
젖은 공간에서
하나의 몸이었다가 여러 개의 몸이 끓고 있다
가장 멀리서 만난 파장 위로
가장 나중에 기록되는 울음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