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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8k3ugQ4SjI
홍영철, 꽃을 바치다
들길 따라 산길 따라 강가에 이르렀네
어머니 돌밭에 앉아 찬밥을 드시네
천길 벼랑 끝에 붉은 꽃 피어있네
어머니 고개 들어 참 곱다 말하시네
낭떠러지 기어올라 그 꽃 꺾어 내려왔네
어머니 목메실까 꽃잎 따서 올려드렸네
꽃 반찬 먹은 입술 꽃잎처럼 붉어지시네
뜬 구름 푸른 물결 붙들고 속절없이 흘러가네
들길 따라 산길 따라 강가에 이르렀을 때
그리워라, 그리워라
가시덤불에 뒹굴어도 아프지 않던 시절이여
박지우, 비의 무덤
비가 무단횡단을 해요
길들이
깜박거리며 경보음을 울려요
뿌리가 잘린 화환들
억지웃음을 짓고 있어요
불륜의 신나 냄새를 풍기는 여관골목에서
앨리스의 고양이가 웃고있어요
배배꼬인 날씨를 진공포장하고 싶어요
과거의 시간이 출렁이는 모형 바다 속으로
싸움을 부추기던 자본의 간판들이 떠내려가요
폐기된 약속들이 모여
미래의 차표를 구걸해요
조각조각 떠도는 허공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새들이 온종일 젖어 있어요
자전거보관소에서는
유기해버린 시간이 녹슬어가고 있어요
세상은 비의 무덤
무너진 하늘이 울컥해요
앓는 빗소리가 잠속을 떠돌아요
하재연, 회전문
그들이 되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들어갈 때는 가능했던 자세가
나올 때는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목한 당신의 마음이 불룩하게 튀어나오는
순간이 어째서
관객들에겐 패러독스입니까
당신은 당신의 밖으로 긴 장갑을
던져주기 바랍니다 간직했거나
감추어졌다 펼쳐지는 지문을 우리는 주울 뿐입니다
당신이 발을 딛는 바닥은
내 머리 위의 심연
가까워지는 당신의 손을 절대
만질 수 없는 투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얀 새의 윤곽을 만드는 검은 새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가 지나치듯이
최정란, 그림자 퍼즐
조각난 그림자를 다시 맞춘다
한 조각이 모자란다
한 조각은 어디 있을까
장롱 밑에도 식탁 밑에도 의자 위에도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림자도 구멍이 난다
모든 그림자에 구멍이 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구멍을 대충 가려보려고
아침마다 서둘러 출근하는 그림자
비틀거리며 집 나서는 그림자
그림자 위에 그림자를 포갠다
김경미, 흑앵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 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 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스카를 닮은
흰 구름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 겹씩 둥그런 필름통 감는 나무들이
찍어두었을 그 사진들 이제 와 없애려 흑백의 나뭇잎들
한 장씩 치마처럼 들춰보는 눅눅한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다 없애고도 여전히 산뜻해지지 않은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무늬 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 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 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 속 스물 두 살의 젖은 우산을 종일 다시 펴보는
때늦은 후회를
오늘의 위대함이라 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