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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출처 : https://youtu.be/VULQIWoPqgI
고증식, 아내의 종종걸음
진종일 치맛자락 날리는
그녀의 종종걸음을 보고 있노라면
집 안 가득 반짝이는 햇살들이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푸른 몸 슬슬 물들기 시작하는
화단의 단풍나무 잎새 위로
이제 마흔 줄 그녀의
언뜻언뜻 흔들리며 가는 눈빛
숭숭 뼛속을 흝고 가는 바람조차도
저 종종걸음에 나가떨어지는 걸 보면
방 안 가득 들어선 푸른 하늘이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제 발걸음이 햇살이고 하늘인 걸
종종거리는 그녀만 모르고 있다
서봉교, 성냥을 긋다
모친을 모시고 찾은
매포의 법당 대웅전에서
초를 꽂고
퇴계선생 누워있는 돈표 성냥갑
한 개피 성냥을 긋다
피! 치! 피어오르는 저 불꽃
삼척 촛대 바위 같은 굵은 촛대마다
불 보시를 나눠 주고
염불하는 팔순의 도니를 돌아보는데
도니 보다 먼저 부처를 모시다가 떠난 이들의
사당과 사리탑이 처량하게
봄 소낙비에 젖고 있다
우리네 생도 저 불꽃같아서
흥하다가 저렇게 돌아가겠지
남아있는 이가 대신 또 그 일을 해 주고
대웅전의 부처님만 그들의 윤회를
미소로 보고 있는데
어리석은 중생이 촛불 보시를 하다가
해탈의 대화를
우연히 아주 우연히
엿듣고 말았다
고영민, 벽돌 한 장
변기 물통에 벽돌 한 장을 넣어두었다
네 안에도 몰래
벽돌 한 장 넣어두고 싶다
내 심장 같은
물을 내리고
다시 새 물이 차오를 때
벽돌 한 장의 부피만큼
더 빨리
네 숨이 나를 향해
차오른다
이정록, 국수
푹 삶아지는 게
삶의 전부일지라도
찬물에 똑바로 정신 가다듬고는
처음 국수틀에서 나올 때처럼 꼿꼿해야 한다
국수걸대 회초리에서 몸 말릴 때처럼
입신양명, 끝내는 승천해야 한다
가장 가난한 입천장을 향해
후룩후룩 날아올라야 한다
이재훈, 방랑의 도시
우연히 날아온 화살에 등을 맞았다
뒤를 돌아보니 신비한 빛이 발밑으로 들이쳤다
등이 아프지는 않았다
나는 화살을 등에 꽂고 거리를 지나다녔다
겨울엔 찬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천천히 바람을 가르며
거리 위를 새겨 나간다
길의 감촉도 모른 채 떠남을 탐했다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명의 숲에서 충혈된 눈으로
비만한 이미지를 본다
모두 집안에 묘지를 두어 엎드려 절한다
어둠에 잠긴 강은 늘 소리를 낸다
소리의 환각을 타고
긴 여행을 떠난다
살갗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 낯선 공기
모두 마법에 걸려 있다
복잡한 사람이고 싶지 않다
내가 생각하는 최선은
단 한 가지만 생각하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