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무산, 숲으로 간다
높은 산에 올라 구름 아래 마을을 보면
사람과 마을들이 저리 하찮다
그러나 산을 처음 올라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결론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
저것이 저리 하찮은 게 아니라
천지가 저리도 크다
우리가 살다 가는 곳이 티끌보다 작고 짧으나
그것도 한 세상 천지의 조각도 천지
마음의 넓은 자리에 올라서 보면
삶이나 역사나 인간의 능력이 저리 하찮다
그러나 처음 내려다본 사람이 아니라면
영원 조각도 영원이라는 것을 알리라
다만 티끌만큼 작은 세상에 사는 내가
산 위에 사는 나에게 나날이 들키며 산다
그 일도 지겨워
숲으로 나는 간다
정호승, 물의 꽃
강물 위에 퍼붓는 소나기가
물의 꽃이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물의 꽃잎이라면
엄마처럼 섬기슭을 쓰다듬는
하얀 파도의 물줄기가
물의 백합이라면
저 잔잔한 호수의 물결이
물의 장미라면
저 거리의 분수가 물의 벚꽃이라면
그래도 낙화할 때를 아는
모든 인간의 눈물이
물의 꽃이라면
김명인, 황금 수레
세상 끝까지 떠돌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
마침내 침상조차 등에 겨워졌을 때
못 가본 길들이 남은 한이 되었다
넘고 넘겨온 고비들이 열사(熱沙)였으므로
젊은 날의 소망이란 끝끝내 무거운
모래주머닐 매단 풍선이었을까
오랫동안 부풀려온 바람이라면
허공에도 질긴 뿌리가 벋는다는 것
가본 세상이거나 못 가본 어느 입구에서
머뭇거리다 내다 버린 그리움들 쌓여갔지만
가지를 벗어난 적이 없는 저 나뭇잎들
세계의 저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손짓한다는 것을
그는, 수척한 침상 너머로 비로소 바라본다
창밖에는 다음 세상으로 굴러가려고
황금수레들이 오래오래 환한 여장을 꾸리고 있었다
최동호, 얼음 얼굴
거품 향기, 찬 면도날
출근길 얼굴
저미고 가는 바람
실핏줄 얼어, 푸른 턱
이파리 다 떨군
나뭇가지
낙하지점, 찾지 못해
투명한
허공 깊이 박혀
눈 거품 얇게
쓴
홍시 얼굴 하나
김제현, 몸에게
안다
안다
다리가 저리도록 기다리게 한 일
지쳐 쓰러진 네게 쓴 알약만 먹인 일 다 안다
오로지 곧은 뼈 하나로
견디어 왔음을
미안하다, 어두운 빗길에 한 짐 산을 지우고
쑥국새 울음까지 지운 일 미안하다
사랑에 빠져 사상에 빠져
무릎을 꿇게 한 일 미안하다
힘들어하는 네 모습 더는 볼 수가 없구나
너는 본시 자유의 몸이었나니 어디로든 가거라
가다가 더 갈 데가 없거든 하늘로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