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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분, 달맞이꽃
소나기 그치고
지친 몸 털고 일어나
자정을 오릅니다
그는 먼 데서
첫인사를 나눴습니다
우린 예전부터 낯익은 듯
눈빛을 섞었지요
새벽의 부름을 받고
그가 서둘러 떠났을 때
나는 발돋움으로 따라갔지만
홀연히 산 너머로
옷자락 감추었습니다
슬픔을 꼭 다문 그의 얼굴
나직이 흐르는 물결로
내 심장 깊숙이 밀려와
날마다 이 몸 줄줄이
밤을 꿰며 오른 언덕은
낮같은 그의 뜨락임을 알았습니다
문태준, 아침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 번 또 한 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문정희, 늙은 꽃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최문자, 사랑의 모든 것
슬픔의 마지막 페이지는 살구색
후일
우리는 살굿빛을 이해했네
훌쩍거리는 동안
증발하지 않는 눈물과
달려 나간 말발굽
살구가 뭉개진 더 진한 살굿빛
풀처럼 조용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따 들어가다
이내 살구를 다 떨군 살구나무
왼쪽 뺨을 살구에 대고
나무 아래 쪼그리고 있을 때
천천히 나를 떠나고 있었네
오래 전 죽은 살구들이
둥둥 떠가는 뭉클뭉클한 살구들이
후일
우리는 살구 맛을 이해했네
슬픔의 혀로
박경남, 가시
가시가 목에 걸렸다
고봉으로 담긴 시간이 정지되었다
바다를 떠난 뼈가 몸에 뿌리 내리더니
저녁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무심히 삼킨 고등어 한 점
그 안에 물의 뼈가 숨어있었다니
물속에서 자란 뼈가 급류처럼 거세다
벌컥벌컥 물을 넘기고 밥 한술 밀어 넣는다
파도에 소용돌이치던 가시
밤새 들이킨 물에 더욱 자라난 것인지
단잠을 쿡쿡 쑤셔대기 시작했다
뿌리가 깊을수록 부력도 커지는 것일까
휘감긴 무늬를 내 몸에 새기고 싶어
물소리의 파동으로
잡힐 듯 밀려가기를 반복하며
도무지 길이 열리지 않는다
통증을 다 피우기 위해 가시는 결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