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기, 솔잎 바늘
소나무 아래 앉아 시집을 읽고 있는데
눈이 자꾸 글을 벗어난다
그때 가을바람 한 무리가 지나가면서
책장 위에 무엇인가 툭, 떨어뜨린다
바늘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쓰시던 눈에 익은 그 바늘
끝은 아직 뾰족하다
밤마다 남폿불을 밝히고 내 양말을 깁던 할머니
그때마다 내 뒤꿈치도 따끔거렸지만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풀려
글이 저절로 눈 속으로 들어왔다
바늘 끝이 환했다
할머니의 바늘을 책갈피에 꽂고
시집을 읽는다
시가 눈에 들어온다
고영민, 동행
길가 돌멩이 하나를 골라
발로 차면서 왔다
저만치 차놓고 다가가 다시 멀리 차면서 왔다
먼 길을 한달음에 왔다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그 돌멩이
모난 눈으로
나를 멀끔히 쳐다본다
영문도 모른 채 내 발에 차여
끌려온 돌멩이 하나
책임 못 질 돌멩이를
집 앞까지 데려왔다
정현종, 준비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욕망은 준비 없이 움직이므로
시작은 그러했듯이
평생의 일들은 한번도
제대로 준비된 적이 없다
물론 또한
경황없이 떠날 것이다
김필규, 묶는다는 것
우리 아부지는 짐을 잘 묶는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었다
일제강점기 공출 낼 때 벼 가마니 묶는 일로 아부지는 마을에 불려 다니셨다
아들녀석 객지 공부하러 나갈 때 부치는 짐도
부자(父子)의 인연만큼이나 팽팽히 묶었지만
부쳐온 짐을 내가 풀 때는 한 가닥만 잡아당기면 풀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의 생에 얽힌 묶임과 매듭은 끝내 풀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신을 묶는 일은
그렇게 짐 잘 묶는 당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내어 주고 아무 말 없이 맡겨 두었었다
짐은 단단히 묶는 일도 중요하지만 풀 때 쉽게 풀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 아부지를 묶은 매듭
저승에 가서 쉬 풀었는지 모르겠다
이태수, 구름 한 채
구름 한 채 허공에 떠 있다
떠 있는 게 아니라 거기 단단히 붙들려 있다
한참 올려다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풀 것 다 풀어 놓고 클 태(太)자로 드러누워
꿈속에 든 건지, 미동조차 없다
아무리 끌어당겨도 아득한
내 마음의 다락방이 유독 큰 저 집
눈을 감았다 떠 보면
새들이 불현듯 까마득하게 날아올라
허공을 뚫고 있다
구름을 날카로운 부리로 마구 쪼아 댄다
그분은 이 한낮에도 캄캄한 마음
다듬이로 두드려 구김살 펴 주고
주름들을 다림질해 준다
나도 모르는 허물들마저 하나씩 지우면서
그중 유별나게 깊이 파인 영혼의 골을 메운다
궁륭 같은 골에 날개를 달아 준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구름 한 채 무참하게 이지러진다
며칠째 두문불출, 내가 구들장을 지고 있는
우리 집, 창 앞까지 낯익은 새들이 날아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들은 저희끼리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