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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규, 방파제
파도는 그냥 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 멀리로 물러섰다가
스르륵 숨을 들이 쉬어서
깊숙이 마시고는
온몸으로 밀어부치듯
있는 힘을 다해
철석같은 맨살을 할퀴는 것이다
무딘 마음을 두드리는 것이다
그런 간곡한 애원으로
가진 것 나누자고 할 때
그걸 막는 방파제는 어쩔 것인가
그 애원을 도맡아
말려야 하는 그런 자세는
수도 없이 부딪는 물살이 안쓰러워
수초 몇 잎을 붙여
달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이해원, 관계
열쇠를 꽂아도 반응이 없다
거실 전화벨 소리가 닫힌 현관문을 넘어 온다
가로막고 선 벽 하나로 이곳과 저곳은 가깝고도 멀다
완벽한 단절이다
말귀가 막힌 철문에 대고 계속 투덜거린 말들이 발등으로 떨어진다
다급한 마음을 주워서 다시 맞춰본다
문을 바꾸겠다는 속마음을 어찌 알았을까
나를 거부하는 벽창호 같은 문
끝내 열리지 않던 벽과 같은 사람이 있었다
소통이란 마음 밑바닥까지 들어가 보는 것
마음 언저리에서 겉돌다가 불통이 되고 말았다
문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니 문의 마음을 헤아린 적 없었다
늘 차가운 열쇠로 그에게 명령만 내렸다
문과 나와의 관계는 제로
지금 내 말을 듣지 않는 건 주인이 늘 일방적이었기 때문
슬금슬금 저녁이 걸어온다
어둠과 함께 문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정진경, 병(病)
아버지 주려고 담근 오디주
발효되기도 전에 아버지가 사라졌으므로
뚜껑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아버지는 오디주 병 안에 밀봉되어 버렸고
아버지와 함께 순장된 오디를 나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존재할 의미를 상실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오디주 붉은 핏줄이 술병을 타고 오르면서 살아났다
봉인된 마개를 언제 헐었는지
오디주를 먹은 아버지
온몸에 오디를 품고 저승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순장이 죽음이라는 인식을 뒤엎었다
순장하는 풍습은 죽음이 아니라
홀로 있는 시간을 배척하는 사람의 병증이다
아버지를 홀로 보내지 않으려는
내 병 증세이다
이태수, 가뭄
길을 가다가 또 길을 잃었다
늘 걷던 길인데도 불현듯 앞이 막막해
놓아 버렸다. 놓아 버린 길 저편 언덕에
자욱하게 시들고 있는 개망초꽃들, 그 꽃들을
내려다보는 낮달. 희멀건 그 얼굴을 빼닮은
내 마음 한 가닥, 미끄러져 내리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린다
오장육부 다 드러낸 강을 굽어보는
정자의 낡은 문짝들이 흔들리고 있다
오랜 가뭄 끝에 소낙비가 쏟아지려는지
눅눅한 바람이 몰려온다
산자락 가문 밭에 물을 퍼다 나르는
농부의 구릿빛 팔뚝에 흘러내리는 구슬땀
내 등허리도 땀범벅이다
땀범벅이다. 삼복에 길을 잃고 헤매는 날들이
그런 떠돌이 마음의 눈도 코도 입도 그렇다
늘 걷던 길인데도 자꾸만 앞이 막막해
놓았던 길을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멀리
물러나 버린다. 비를 부르던 바람도 잦아들고
떠돌던 내 마음 한 가닥
나뭇가지에 매달려 마냥 흔들리고 있다
신덕룡, 꽃으로 눈을 가린들
꽃그늘 아래 누드 화보라도 찍듯
광어 한 마리
홀라당 벌거벗고 무 채반 위에 누웠다
햇볕과 바람과 야합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다고
더 가리고 숨길 게 뭐가 있겠냐고
부끄러움도 혁명이라는데
꽃으로 눈을 가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듯, 누웠다